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162

다낭에서 마주한 한국의 그림자 낯선 땅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익숙했다. 다낭 공항에 내리는 순간,나는 오래전 외갓집 마당 끝 논두렁에서 맞았던그 여름 바람을 떠올렸다. 덥고 습할 거라던 예보와 달리기온은 30도 남짓. 흐린 하늘 덕에서울보다 훨씬 부드럽게 느껴졌다. 공기 속에 묘한 따뜻함이 있었다.여행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가이드는 유쾌했다.노란 벽이 줄지어 선 호이안 거리,코코넛 향이 감도는 커피,강 위를 떠다니는 등불. 말끝마다 웃음이 묻었고,우리도 그 웃음에 이끌려 걸었다. 그런데, 그가 툭 던진 말 한마디가내 귀에 걸렸다. “여기, 예전에 한국군이 있었어요.전쟁이 있었던 곳이죠.” 농담처럼 가벼운 말투였지만그 순간,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나는 웃지 못했다.말의 끝자락에서 묵직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다낭에서 남쪽으.. 2025. 7. 28.
고소한 추억, 뻥튀기 소리로 이어지던 마을 이야기 겨울 산골의 새벽은 유난히 조용하다.마당가 감나무엔 까치밥 몇 알이 매달려 있고,굽이진 산등성이엔 눈이 포근한 목도리처럼 둘러앉아 있다. 정월 초하루 아침.그 고요를 깨운 건 한 줄기 외침이었다. “자— 튀기오!” 아이들은 문소리보다 먼저 반응했다.양말도 신지 않은 채 마당으로 내달렸다. 어김없이 뻥튀기 아저씨가 오신 것이다.자전거 뒤에 기계를 싣고,읍내에서부터 눈길을 헤치고 도착한 그는마치 한 해를 열어주는 전령 같았다. 군용 점퍼, 귀마개 달린 털모자, 낡은 고무장갑.투박한 그 복장이아이들 눈엔 ‘진짜 사람이 왔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아저씨는 마을 어귀 돌담 옆,양지바른 자리 한켠에 기계를 세운다. 마을 어른들이 하나둘 자루를 들고 모여든다.강냉이, 찹쌀, 보리…단순한 곡식이 아닌,겨울을 버틸 바삭.. 2025. 7. 24.
돌은 말이 없지만, 가르친다 – 강화 고인돌에서 배운 것 강화도의 들판을 지나면,바람이 낮게 눕는 언덕 위에 고인돌이 있다. 그 돌은 수천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시간도, 전쟁도, 계절도 다 지나갔지만돌은 남았다. 나는 지금, 그 돌 옆에 서 있다.제자들과 함께. 아이들과 함께 강화 고인돌 유적지를 찾은 날,봄기운이 살짝 번진 하늘 아래들꽃이 수줍게 피어 있었다. 역사 수업의 연장선이라며짧은 견학으로 계획된 일정이었지만,나는 이 시간을 조금은 다르게 느끼고 싶었다. 단순한 유적 답사를 넘어,이 돌 앞에서 우리가 함께멈춰 설 수 있기를 바랐다. “선생님, 이게 진짜 무덤이에요?”한 아이가 물었다.“그래. 아주, 아주 오래전 사람의 무덤이야.”“그럼 무섭지 않아요?” 나는 대답 대신,아이와 함께 돌 앞에 잠시 앉았다. 눈을 감으면,돌 아래로 시간이 스며든다. .. 2025. 7. 23.
“군중심리와 비난 문화의 진실” 사람들이 모이면 묘한 일이 일어난다.조용하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 많아지고,신중하던 사람도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면 그 말이 진실처럼 들리고,그 옆에서 손을 뻗는 사람은 옳아 보인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누군가를 향한 손가락질이 시작된다. 처음엔 다들 조심스러웠다.“진짜일까?”“설마 그 사람이…” 하지만 한 사람이 말한다.“저 사람, 문제 있어 보여.” 그 순간,무너졌던 침묵에서 말들이 쏟아진다.“그럴 줄 알았어.” “역시."“이제야 드러난 거지.” 그 말들은 점점단단해지고,무거워진다. 그리고 하나의 돌이 된다. 그 돌은이름을 가진 누군가를 향해 날아간다. 내가 그 장면을 처음 본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전학 온 친구 하나가 있었다.말수가 적고, 어딘가 어눌한 아이였다. 특별한 잘.. 2025. 7. 22.
“선생님, 참새를 진짜 먹었어요?” 그날 교실은 웃음바다였다 수업 시간, 학생들의 눈이 흐릿해질 때가 있다.졸음이 스멀스멀 기어들고, 집중력은 교실 밖을 배회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떠올렸다.하나는 분위기를 단단하게 조여 긴장을 유도하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힘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방식이었다. 나는 후자였다.웃음과 몰입, 그리고 그 속에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배움.그것이 내가 걸어온 30년 교직 생활의 방식이었다. 그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도,아이들이 가장 크게 반응했던 건 의외로 '참새고기' 이야기였다. “참새요? 그걸… 먹었어요?” 아이들은 반신반의하며 웃었다.그리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옛이야기를 꺼냈다. 한때 그 작은 새는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기도 했다고.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지만,그땐 흔한 일이었다. 1960년대, 골.. 2025. 7. 21.
“꼰대라떼의 고백: 젊은 세대 앞에서 멈칫한 날” 나는 내 생각이 유연하다고 믿어왔다.젊은이들을 존중했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 애썼으며,내 기준이 그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나를 보며 친구들은 “너는 안 늙는다”고 말하곤 했다. 어느 겨울날, 교실에서 수업 중 아이들과‘추억’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순간이었다. “나는 어릴 때 달력을 찢어 연을 만들었단다.갈퀴살 하나하나 깎아서….” 내 말에 한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우린 드론 날려요.” 말은 짧았지만, 그 표정은 길었다.그 말에 나는 잠시 멈췄고,창밖의 바람만 바라봤다. 그 순간, 내 기억 속의 연이잠시 흔들리며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며칠 뒤, 딸과 함께 길을 걷다젊은 여성들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마주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요즘은 여자들도 담배를 피우는구나.” 딸은.. 2025.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