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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과외 선생님이 된 어느 날” 나는 그 애를 도서관에서 처음 봤다.교복 셔츠 단추 하나는 풀려 있었고, 손엔 항상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모범생 같지도, 게으른 학생 같지도 않았다.조용히 자리에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신경 쓰였다. 하루는 우연히 그 화면을 보게 됐다.“이 문제, 전에도 틀렸어요. 이번에는 이해되셨나요?”음성은 없고, 글씨만 툭툭 튀어나왔다.그 애는 고개만 끄덕이며 펜을 들었다.그 장면은,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옆에 앉아 문제를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AI야.”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 애가 웃으며 말했다.“요즘은 과외도 AI가 해줘. 선생님보다 나한텐 이게 더 잘 맞아.” 솔직히 말해 처음엔 피식 웃음이 나왔다.기계가 사람을 가르친다니, 그런 말이 어딨어?하지만 며칠 동안 그 애를 지켜본 후.. 2025. 8. 9.
결과보다 과정이 아름다운 이유 비 오는 날, 우체국 앞을 지나가다한참을 멈춰 섰다. 유리창 너머, 봉투를 고르는 사람들.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이는 손끝.나는 오래전 한 장의 손편지를 떠올렸다.도착하지 않은, 그러나 내 마음에 오래 남은. 인생이 한 장의 편지라면,그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글의 끝맺음, 즉 결과일까.아니면, 꾹꾹 눌러쓴 그 과정일까. 나는 두 사람을 안다. A는 조용히 자신의 일터를 지키는 사람이다.하루의 시작을 문 여는 손끝으로 열고,유리창을 닦으며 하루를 반짝이게 만든다.말은 정직하고, 행동은 반듯하다. 하지만 그는 눈에 띄지 않는다.매출도 없다.그의 시간은 언제나 ‘과정’ 속에 머문다. B는 다르다.불쑥 나타나고, 말은 빠르다.화려한 언변과 적당한 과장이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는 결과를 만든다.눈에 보이는 수치,.. 2025. 8. 8.
“나는 왜 사람들 속에서 더 외로울까” 어릴 적부터사람들 속에 섞이는 게 힘들었다. 사람들이 웃을 때,나는 왜 웃는지를 먼저 눈치챘고, 말이 오갈 때,단어 사이에 숨은 감정을 먼저 듣는 아이였다. 그건 마치음악회에서 유일하게 음향 장비의 잡음을 듣는 기분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그걸“예민하다”고 했지만,나는 그것이 **“깨어 있다”**는 뜻이라고 믿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나는 '너무 많은 사람의 온기'를 견디지 못한다.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내 마음은 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짊어지고 있었다. 즐거운 척, 괜찮은 척,다정한 척하는 말들에하루치 에너지를 다 써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말한다.“그 정도는 다 그래. 너만 예민한 거 아냐.”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나는 더 조용히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모두.. 2025. 8. 7.
삶의 구석에서 피어난 곰팡이 꽃 대학시절 자취방,3월의 습한 바람이 벽지를 들추던 어느 날이었다.문득 벽 모서리에 거뭇한 얼룩이 피어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먼지인 줄 알았다.그런데 며칠 후 다시 보니,마치 누군가 거기다 무늬를 새겨놓은 듯 번져 있었다.곰팡이였다. 닦아도 금세 다시 생겼고,햇살 없는 방 한구석에서 자기 세상을 만들어가듯 자리잡았다.곰팡이를 보며‘생명력 하나는 참 질기다’ 싶었지만,솔직히 보기엔 썩 탐탁지 않았다. 지워야 할 흔적, 숨기고 싶은 얼룩.그게 내 인생의 어떤 시절과 닮아 있다는 생각은그로부터 훨씬 나중에야 들었다. 대학 시절은 화려하지 않았다.밥값을 아끼려고 점심 대신 보리차로 배를 채우고,수업 끝나면 도서관 말고는 갈 데가 없었다. 친구들은 취직 준비에 바빴고,나는 여전히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그.. 2025. 8. 6.
초록 들판 속으로 도망친 하루 – 강화도에서 찾은 쉼 우리는 매일 어딘가로부터 도망친다.현실의 무게에 눌리고, 생각의 속도에 지치며,가끔은 멈추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 간신히 들고 산다. 그런데 문제는 뭘 버려야 할지는 알겠는데,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날 아침, 나는 정해진 계획 없이 차에 올랐다.목적지도 이유도 없이, 그냥 어디든.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단 하나, 초록이었다. 숨 쉴 틈 하나 없는 도시에서 벗어나어딘가 나를 기다리는 초록으로 향했다. 강화도로 향하는 길.처음엔 회색 건물들이 이어졌지만,조금씩 논과 밭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 속에서초록이 천천히 퍼져나왔다. 그 초록이 마음속 먼지를 털어내는 듯했다.‘잘 오고 있다.’그 말이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망월리 들판에 도착했을 때,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2025. 8. 5.
“세상을 정화하는 건 쓰레기통이다” 집 구석, 언제나 같은 자리에 놓여 있던 쓰레기통이 있었다.뚜껑은 닫혀 있었지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 먹다 남은 과일 껍질, 젖은 티슈, 찢어진 메모지.말하자면, 남들이 원치 않는 것들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어릴 땐 그 통이 무서웠다.냄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왠지, 나의 어설픈 흔적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쓸모없다고 판단한 것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매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통은 늘 가득 찼고, 또 비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말했다.“쟤는 그냥 쓰레기통이야.” 가볍게 던진 한마디였다.다들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 말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쓰레기통이라… 그 말엔 무언가 묘한 이중성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쓰레기통은.. 2025. 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