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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안 바구니배 여행기 – 강 위의 회전과 미소 강은 잔잔했다.마치 누군가 찻잔 속 설탕을 다 녹인 뒤, 숟가락을 빼놓은 것처럼 고요했다. 햇살이 수면 위에 반짝이며 흩어졌고,그 위를 코코넛 나무 그림자가 살짝 덮었다. 선착장은 나무 냄새와 강물의 습기가 뒤섞여, 오래된 사진 속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곳에 바구니배가 기다리고 있었다.대나무를 정성껏 엮어 만든 둥근 배.세 사람이 타면 꼭 맞는 크기였다. 발을 올리자 배가 미세하게 기울었고,물 위에서 작은 파문이 퍼졌다. 사공은 구릿빛 피부에 바람에 씻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가 노를 저으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 “빨리빨리!”이어 밝게 웃으며,“아싸 가오리!”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머뭇거리다,“언니 예뻐요!” 그 세 마디가 그의 한국어 전부였다.억양은 어설펐지만, 말끝마다 장난기와 호감이 묻어났.. 2025. 8. 15.
그랜드캐니언에서 느낀 자유, 협곡 위를 나는 꿈 비행기가 애리조나 주 북부의 하늘을 스칠 때,옆자리의 할아버지가 불쑥 말을 걸었다. “처음인가요? 그랜드캐니언?”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창밖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곧, 지구의 나이를 보게 될 거예요.” 그 순간,창밖 아래 거대한 틈이 열렸다. 붉고 검붉은 바위들이 계단처럼 이어지고,그 사이로 어둠이 천천히 잠겨 있었다. 지도가 아니라, 사진도 아니라,지구의 살이 깊게 베인 상처였다. 나는 숨이 멎는 듯했고,손끝이 저절로 창문을 붙들었다. 전망대에 내렸을 때,공기는 다른 세상의 것처럼 느껴졌다. 길이 446km, 깊이 평균 1.6km, 폭 6.4~29km. 그 숫자들은 입 안에서 금세 부서져가루처럼 흩어졌다. 이곳은 수학이 아니라 감각의 영역이었다. 바람이 협곡의 벽을 타고 올라와.. 2025. 8. 14.
“흙길과 소똥, 그리고 사라진 친구 소똥구리” 시골의 흙길은 계절마다 소리를 달리 냈다.장마 뒤엔 질퍽질퍽, 가을볕 아래선 바삭바삭. 그 길 위를 느릿느릿 지나가던 건 소달구지였고,마을마다 꼭 한 마리씩 있던 소는 고삐를 달고 농부의 뒤를 따랐다. 길엔 자연스레 소똥이 떨어졌고,아무도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 누군가의 뒷모습처럼 늘 거기 있었고,계절이 바뀌면 그대로 말라갔다. 그 마른 소똥 아래엔 작은 생명이 살았다.소똥구리. 어린 나는 그 벌레의 이름조차 몰랐지만,똥 위를 성실하게 걷거나, 그 밑을 파고든 곤충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녀석들은 소똥을 굴리지 않았다.대신 소똥 아래에 작은 구멍을 파서 집을 지었다. 따뜻하고 축축한, 햇살 냄새 배인 똥지붕 아래,소똥구리는 그렇게 하루를 살아냈다. 나는 그게 늘 신기했다.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말라붙은 소.. 2025. 8. 13.
소년과 한우, 그리고 컴퓨터 앞의 나 어릴 적, 해 질 무렵이면나는 고무신을 질질 끌며 마당을 걷곤 했다. 어느 쪽 발목이 더 늘어났는지 모를 고무신은늘 한 짝이 먼저 툭 튀어나갔다. 사랑방 기둥의 그림자가안마당 절반을 넘기면,나는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암소의 고삐를 쥐었다. “가자. 오늘은 네가 먼저 앞장서.” 소는 워낭 소리를 한 번 울리고는천천히 발을 옮겼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사이였다. 나는 풀을 뜯는 소를 지켜보다가바위에 등을 기대어 책장을 넘겼다. 나뭇잎이 바람에 갈리는 소리,소의 입에서 풀잎이 찢기는 소리,그리고 가끔씩 나는 쇠파리 소리. 어느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그 모든 소리가, 내 하루의 배경음이었다. 어느 날은 소가 갑자기 산 아래로 내달렸다. 책을 던지고 뒤쫓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지만,소는 천천히 돌아와내 손바.. 2025. 8. 12.
"빛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의 이야기" 가끔 그런 사람을 본다.길을 걷다가, 지하철에서, 혹은 커피숍 창가에 앉은 모습으로.빛이 나는 사람. 설명할 수는 없지만,‘아, 저 사람은 다 가졌구나’ 싶은 사람이 있다. 잘생긴 얼굴, 단정한 옷차림,말할 때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신감.그 옆에 비친 나의 모습은흐릿하고, 작고, 조용하다. 그럴 때면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속으로 묻는다.“왜 나는 아무것도 안 갖고 태어난 걸까?” 세상은 공평하다고 배웠지만,정작 살아보면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눈에 띄게 많은 걸 갖고 태어난다.좋은 얼굴, 좋은 성격, 넉넉한 환경, 타고난 실력까지. 그런데 나는?외모도 평범, 집안도 평범,성격은 내성적이고, 건강은 늘 어디가 아프다.이렇게 조용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만살아가야 하는 걸까.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 2025. 8. 11.
불타는 산, 돌아오는 연어, 그리고 옐로스톤에서 배운 것 자연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감탄과 경외를 섞어 말한다.하지만 미국의 국립공원들은 그 감탄의 스케일을 가늠하기조차 어렵게 만든다.그중에서도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은 나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자연 철학’을 가르쳐준 교실이었다.1872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곳은, 지금까지도 세계인의 버킷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명소다.🚗 이틀을 달려 도착한 대자연여정은 캘리포니아 북쪽 끝에서 시작됐다.여동생이 사는 도시에서 차를 몰고 출발했을 때만 해도, ‘이틀이나 달려야 한다’는 말이 그저 비유인 줄 알았다.하지만 미국의 지도를 펼쳐보면, 도시와 도시 사이의 간격이 한국과는 차원이 다르다.고속도로의 양쪽으로 펼쳐진 풍경은 시간.. 2025.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