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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라고 말해준 건 햇살도, 타인도 아닌 자기돌봄이었다” 현관 앞, 말라죽은 화분 하나가 있다.물도 못 먹고, 볕도 못 받았을 그 화분은한때는 꽃을 피우던 화분이었다.사실, 나도 그렇다. 한때는 꽃을 피우던 사람이었다.누군가의 말에 쉽게 웃고,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고 괜히 기분 좋아하던 사람.그런데 요즘 나는,물도 못 먹고, 볕도 못 받고 있었다.누구 탓일까? 직장? 인간관계? 바쁜 일정?그것보다 더 오래 나를 갉아먹은 건,‘나 하나쯤은 괜찮겠지’라는 내 습관이었다.남들 챙기느라 지쳐 돌아온 밤, 전자레인지에 돌린 밥을 허겁지겁 먹으며나는 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괜찮았어?”, “힘들진 않았어?”그 당연한 안부 하나 없이,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그 화분을 쓰레기봉투에 넣으려다 멈췄다.줄기를 만져보니 아직 단단했다.잎은 다 떨어졌지.. 2025. 7. 13.
“죽지 않는 인간, 기술은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오래 사는 것’은 곧 ‘잘 사는 것’일까.어릴 적 나는 백세를 넘긴 할머니의 주름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긴 세월을 살아온 얼굴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주름은 삶의 무게라기보다 기다림처럼 느껴졌다. 마치 인간은 본능적으로,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존재처럼. 지금 우리는 그 기다림에 과학이라는 이름의 답을 갖고 다가간다. 20세기 초 50세에 불과하던 기대수명은 이제 80세를 넘어섰고, 어떤 과학자들은 120세, 심지어 ‘무한 수명’의 가능성까지 이야기한다.과연 우리는 죽지 않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노화를 다루는 방식을 달리 배우고 있는 걸까. 하버드의 데이비드 싱클레어 박사는 노화를 ‘질병’으로 분류하며, NAD⁺ 같은 노화 억제 물질을 활용해 세포 기능을 젊게 유지하는 연구를 이끌.. 2025. 7. 12.
"찬물샤워의 건강효과, 그 시작은 시골 등목이었다" 여름이었다.햇살은 이글거리고, 바람은 숨을 죽인 채 나뭇잎 하나 흔들지 않았다.나는 벌겋게 달궈진 마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놀다, 지쳐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얘야, 더워 죽겠지? 등 좀 식히자!” 잠시 후, 우물에서 퍼온 찬물이 담긴 양동이가 등장했다.나는 도망칠 타이밍을 놓쳤고, 그대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찰싹’. 등허리를 타고 내려온 그 한 바가지.숨이 멎을 듯한 그 찬물은, 단지 몸을 식히는 것을 넘어뇌 속까지 번쩍 깨우는 듯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깨어난다, 살아난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그것이 내 인생 첫 번째 '찬물샤워'였다. 이름도 없고 과학도 없던 시절,할머니는 그걸 그냥 “등목”이라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시원하다고만 할.. 2025. 7. 11.
“잘 살아온 줄 알았다… 그런데 거울이 말을 걸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리하다가손이 멈췄다. 눈가에 붉게 부은 자국이 보였다.잠을 설친 탓이었다. 그제야 어젯밤 회식 자리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넌 너무 감정을 숨겨. 그래서 좀 피곤해.”말한 사람은 아무 악의 없이 던졌을 테고,분위기도 가볍게 웃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말이 집에 와서도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샤워기 소리에도,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에도자꾸 그 말이 섞여 들렸다. 그렇게 나는말 한 마디에 하루가 금이 갔다.거울 속 나는 익숙했다.일할 때 쓰는 정돈된 표정,어색하지 않게 미소 지을 수 있는 눈꼬리,피곤해도 버텨낼 수 있는 턱선. 그런데 그날은 그 익숙한 얼굴이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속이 빈 채로 껍질만 남은 사람. 거울이 나를 비춘 게 아니라,내가 거울에 나를 흉내 낸 것 같았.. 2025. 7. 10.
“콩란을 보며 아이를 기억한다: 짧았던 담임의 기록” – 작년, 한 아이와 나눈 작은 교감 창가 옆에 작은 화분이 있다.초록빛 구슬들이 주렁주렁 달려,아슬아슬하게 아래로 늘어진다.햇살을 받을 때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그 곁을 지날 때마다,나는 문득 한 아이가 떠오른다. 나는 2년 전 명예퇴직을 했다.교직에서 30년 가까이 아이들과 지내왔고,이제는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 봄,중학교에서 1학년 담임 자리가한 달간 비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한 번 더 교실에 서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기간제 교사로 나가게 되었다. 고등학교만 근무하던 나에게중학교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아이들은 수시로 달려와“누가 이랬어요, 저랬어요!”서로를 고자질했고,나는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감정의 조율자이자 중재자가 되어야 했다. 학부모들의 전화도 하.. 2025. 7. 9.
“아내를 잃고, 강아지를 얻다… 여월이와의 치유 산책기” 아내를 떠나보낸 지 반년쯤 됐을 무렵이었다.허전한 집안 분위기를 못 견딘 건 나보다 아이들이 먼저였다. “아빠, 우리도 강아지 키우면 안 돼요?”처음엔 무심히 넘겼지만, 아이들이 몇 번이고 조르던 어느 날, 마침내 나는 마음을 열었다. 강원도.아이들 친구 집에서 태어난 강아지를 보러 함께 내려갔다.작은 몸에 까만 눈망울을 가진 녀석이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가만히 내 손 냄새를 맡고는, 발 앞에 앉아 올려다보던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이름을 '여월이'라고 지었다.엄마를 잃은 아이들과 아빠, 그리고 새 식구.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시 조금씩 완성되어 갔다. 여월이는 참 착하다.8년 동안 말썽 한번 부린 적이 없다.자기 장난감 외에는 건들지 않고, 휴지통에 고기 냄새가 풍겨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마치.. 2025.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