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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

삶의 구석에서 피어난 곰팡이 꽃

by 선비천사 2025. 8. 6.

 

 

대학시절 자취방,
3월의 습한 바람이 벽지를 들추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벽 모서리에 거뭇한 얼룩이 피어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먼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보니,
마치 누군가 거기다 무늬를 새겨놓은 듯 번져 있었다.
곰팡이였다.

 

닦아도 금세 다시 생겼고,
햇살 없는 방 한구석에서 자기 세상을 만들어가듯 자리잡았다.
곰팡이를 보며
‘생명력 하나는 참 질기다’ 싶었지만,
솔직히 보기엔 썩 탐탁지 않았다.

 

지워야 할 흔적, 숨기고 싶은 얼룩.
그게 내 인생의 어떤 시절과 닮아 있다는 생각은
그로부터 훨씬 나중에야 들었다.

 

대학 시절은 화려하지 않았다.
밥값을 아끼려고 점심 대신 보리차로 배를 채우고,
수업 끝나면 도서관 말고는 갈 데가 없었다.

 

친구들은 취직 준비에 바빴고,
나는 여전히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무슨 이유였는지도 모른 채,
한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시기가 찾아왔다.
책도 손에 안 잡히고,
사람 만나기도 버거워졌다.

 

그때 난, 곰팡이처럼
구석에서 조용히 버티는 날들을 살았다.

 

낮에는 멀쩡한 척 학교에 나가고,
밤이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간들.

 

누가 물어보면
“그냥 좀 피곤해서”라고 말했지만,
그건 단지 내 마음의 눅눅함을
설명할 단어가 없어서였다.

 

감정이 말라버린 게 아니라,
너무 차가운 습기로 젖어 있었던 거다.

 

어느 날, 벽지 사이로 피어난 곰팡이를 바라보다가
이상하게도 그게 위로가 되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자리에서,
누가 돌보지 않아도 꿋꿋이 피어나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건
꼭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자리에서도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걸
곰팡이한테 배웠다.

 

나중에 알게 됐다.
곰팡이는 약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곰팡이를 싫어하지만,
그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성분이 나온다.
보기에는 더럽고 기피 대상이지만,
그 속에는 치유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그걸 알게 되면서,
한때의 내 모습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세월은 흘렀고,
마음속 구석구석에도
오래된 곰팡이 하나쯤은 남아 있다.
완전히 지워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 얼룩이 있었기에
내가 멈추지 않았고,
흔들리면서도 견딜 수 있었다.

 

이제는 곰팡이를 보면
불쾌함보다 다정함이 먼저 든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자라며 자기 자리를 지켜낸 것.
그것도 꽃이라면 꽃일 것이다.

 

못생겼지만 진짜였고,
지워져도 다시 피어나며
말없이 나를 닮아 있었던 — 그런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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