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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의 알을 깨며 사는가 점심으로 찐 달걀을 먹다껍질을 까던 손이 잠시 멈췄다.그걸 낳은 닭이 문득 떠올랐다. 기계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알을 낳는 삶.닭은 그것을 스스로의 운명이라 믿었을까,아니면, 인간이 그렇게 믿게 만든 걸까. 껍질을 벗기자새하얀 흰자 속에 노란 노른자가해처럼 나를 바라본다.병아리였을 수도 있고,그저 내 점심이었을 수도 있다. 닭은 정말 이 알을 나에게 주었을까.아니면, 나는 빼앗은 걸까.나는 여전히, 조용히 씹으며 생각 중이다. 우리는 알을 삶고,지단을 부치고,때로는 화가 나면 그것을 던지기도 한다.영양이 어쩌고, 피부가 어쩌고 말하면서정작, “고맙다”는 말은잊은 지 오래다. 한 번은고등학생 시절,친구와 싸우다 달걀을 던진 적이 있다.그때 깨진 건 달걀이 아니라,서툰 내 마음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우주도.. 2025. 5. 8.
내 마음에도 텃밭 하나 있다 봄이면나는 작은 삽 하나를 꺼낸다. 땅을 뒤집다 보면문득, 마음도 파헤쳐진다.묵은 감정이 흙먼지처럼 날린다. 텃밭은 조용하다.그러나그 안에선 매일 전쟁이 벌어진다.뿌리 하나가 자리를 찾고,잎사귀 하나가햇빛을 쟁취한다. 누군가는텃밭을 노인의 소일거리라 말하겠지만,나는 안다.그건 아주 조심스러운 고백이다.한 번 져버린 다짐을다시 세우는 일이다. 언젠가심어둔 무가 죄다 시든 날이 있었다.왜인지 몰라그저 멀뚱히 바라보다가,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도 그렇구나.가만히 두면언제든 시들 수 있구나. 물도 적었고,햇살은 독했다.아마도 나는며칠간 마음을 두지 않았던 거다. 텃밭에선 자주 반성하고,가끔 울고,어쩌다 웃는다. 어느 날덜 익은 토마토 하나가내 얼굴을 닮아 있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푸르스름하게 매달려 있었다... 2025. 5. 8.
「자물쇠는 이미 열려 있었다-맹꽁이 소리」 나는 오랫동안 닫혀 있다고 믿었다.문이든, 가능성이든, 세상이든.애초에 문고리조차 안 잡아보고선,“아, 저건 잠겼겠지.”그렇게 혼자 판단하고 혼자 낙담했다. 그날도 그랬다.습기 머금은 오후, 아무 일도 하기 싫은 날.창밖을 멍하니 보다가 문이 눈에 들어왔다.오래된 창고 문.닳아버린 자물쇠가 다소곳이 열려 있었다.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말이다. “어라?”그 순간, 어딘가에서 맹꽁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맹꽁 맹꽁?아니다.그들은 다소 민망하게,‘맹맹’ 하며 운다. 그 울음소리, 왠지 낯이 익었다.삐걱거리는 의자, 애매한 변명,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내 안에서 자주 울리던 그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맹맹했다.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할 수 없는 일에 겁을 먹고,“괜찮아”라며 제풀에 주저앉던 순간들.다 그놈의 맹.. 2025. 5. 8.
약한 자의 표정 처음으로 맞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그건 분노의 손길도 아니고, 분명한 훈육도 아니었다.그저,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세상의 질서 같은 것이었다. 소리는 뺨보다 먼저 왔다.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스치고, 이내 따뜻하고 무거운 감각이 얼굴에 닿았다.놀랄 틈도 없이 표정이 무너졌다. “인상 쓰지 마.” 말이 날아왔다.나는 무너진 얼굴 위에, 급히 웃음을 얹었다.서툰 웃음은 도리어 모욕처럼 느껴졌는지, 또다시 손이 날아왔다.웃는 것도, 아닌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억울해서도, 서러워서도 아니었다.그저, 몸이 흘려버린 감정의 잔여물이었다. “울어? 누가 울랬어?” 이제 나는 무표정이 되기로 했다.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사라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의.. 2025. 5. 7.
척추 너머에서 생명이 꿈틀거린다-담쟁이 덩굴 며칠 전, 지하철에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등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숨이 약간 찼다.내 몸 어딘가가 계속 말없이 고장 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내 등이 이상하게 낯설었다.마치 돌보지 못한 정원처럼.그 위로 담쟁이덩굴 같은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누군가 다듬어주길 기다렸지만, 내겐 전지가위도, 정원사도 없었다. 며칠 전 공원에서, 날개가 다친 새를 봤다.날지 못하고 풀숲에 주저앉은 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조심스레 손바닥에 얹었다.그 따뜻하고 가벼운 무게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날고 싶지만 날 수 없었던 그 새는,그때의 나 같았다.꿈이 꺾였을 때,세상에 앉아만 있던 내 마음 같았다. 신의 뜻을 기다려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아프고 지친 날엔,신보다 의사의 손끝이 .. 2025. 5. 6.
화초를 키우는 할머니 살다 보니 알겠더군요.말이 꼭 있어야 마음이 전해지는 건 아니란 걸요. 수줍은 웃음 하나,따뜻한 눈빛 하나면 충분할 때가 있어요. 이젠 제 곁엔 조용함만 남았어요.자식들은 바쁘게 살고,영감도 먼저 떠났죠. 아무도 없는 집에서하루가 그냥 스쳐 가고,말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웃이 죽어가던 화초 하나를 주고 갔어요.“당신 손길이라면 혹시…”화초는 잎도 없고,흙도 바싹 말라 있었죠.꼭 제 모습 같았어요.그래도 물을 한 모금 줬어요. 며칠 뒤,가지 끝이 초록빛으로 살아났죠.노란 꽃 하나가 피어났을 땐그 꽃이 말하는 것 같았어요.“할머니, 나 살아 있어요.” 그날 이후,베란다에 화분이 늘기 시작했어요. 잎이 뾰족한 아이,줄기가 춤추는 아이,꽃을 꼭꼭 숨겼다 피우는 아이들.그 애들이 절 기다.. 2025.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