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 한 켤레의 기억
어릴 적, 내 발엔 늘 검정 고무신이 끼워져 있었다.비 오면 물이 고이고,더운 날엔 땀이 배어 미끄러지던 신발.뒤축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걷다 보면 자꾸만 벗겨져저만치 달아나곤 했다. 그런 나에게아버지는 어느 날, 새 고무신을 사주셨다.말은 없었고, 표정도 무덤덤했지만그날 밤 나는검정 고무신을 꼭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그건 나에겐 작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오래가지 않았다.학교에 신고 간 첫날,신발장 앞에 벗어둔 고무신은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니 사라져 있었다.나는 복도 끝까지 울면서 돌아다녔고,선생님도, 친구들도 말이 없었다.다음 날, 아버지는 또 다른 새 고무신을 내밀었다.말없이, 조용히. 지금 생각해보면,그 고무신을 가져간 아이는 누구였을까.그 아이도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녔던 걸까.혹은,아무..
2025. 5. 20.
아카시아가 피면 떠오르는 얼굴
온 동네에 아카시아 향이 번지기 시작하면나는 어김없이, 그 애를 떠올린다. 5학년 봄,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듯한 아이였다.운동화를 벗으면 양말에 발가락이 비칠 만큼,매일 뛰어다니며 놀았다. 하굣길은 늘 똑같았지만,그날그날의 이유는 달랐다.누군가는 고양이를 따라가고,나는 꽃길을 따라갔다. 아카시아는 언제나 길가에 피어 있었고하얗게 핀 꽃잎 아래서는누구든 시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꽃을 따먹었고,지치면 나무 밑에 드러누워햇살을 똑같이 나눠 가졌다.그날도 그랬다.나는 흙바닥에 앉아아카시아 꽃잎을 손톱으로 반 갈라보고 있었다. 그 애는,서울에서 전학 온 그 애는조용히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말도 없이,아무 이유도 없이.잠시 후, 그 애가 말했다. “이 꽃, 꿀맛 나지 않아? 난 싫던데.” 나는 ..
2025. 5. 19.
추어탕 가는 미꾸라지
나는 미꾸라지다.진흙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고,잡히지 않기 위해 미끄러워졌고,작고 연약해서 늘 숨었다.그런 나에게도, ‘가는 길’이 있다.그 길 끝엔 뚝배기가 끓고 있다. 처음엔 도망치려 했다.물을 흐리며 빠져나가고,그물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게 전부였다.하지만 세상은 어느새모든 출구를 막고,“넌 결국 추어탕이 될 거야”라며 웃었다. 그래서 나는 다르게 결심했다.도망치는 대신, 끓는 냄비로 스스로 들어가기로.흔들어 놓기로 했다.맑아 보이던 물 아래 깔린검고 눅진한 진실을 끄집어내기로 했다. 끓는 물 속에서내 살점은 부서지고,뼈는 가루가 되겠지만,그 국물은 진해질 것이다.그 맛은 누군가의 속을 데우고,한 줌 용기를 삼키게 할 것이다. 나는 소모되는 존재가 아니라,우러나는 존재가 되기로 했다.억눌림을..
2025.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