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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빗자루를 든 이유, 아이들은 몰랐겠지만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 한쪽에서오래된 탈무드 책 한 권을 무심코 펼쳤다. 짧은 이야기들 중이상하게 마음을 오래 붙잡은 장면이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랍비에게 물었다.“제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진리를 말씀해 주세요.” 랍비는 주저 없이 답했다.“네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단출한 문장이었지만,그 말은 조용히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기 전에‘내가 먼저 해볼 수 있을까?’를 떠올리게 된 건. 담임이 되어 아이들과 지낼 때도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었다.청소 시간이 되면교사라는 이유로 지시만 하기보다는함께 손을 움직이는 게 내겐 익숙했다. 걸레를 들고 창틀을 닦고,구석의 먼지를 털고, 쓰레기도 함께 버렸다.그러던 어느 .. 2025. 5. 22.
교사의 혼밥, 아이들이 먼저 알아챘다 학교를 옮긴 지 며칠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점심시간,급식실 한쪽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새 교무실도, 낯선 얼굴들도아직은 어색한 풍경이었다.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일도선뜻 쉽지 않았다.그래서 그냥혼자 밥을 먹었다. 숟가락은 입으로 향했지만,마음은 자꾸 딴 데를 향했다.다음 날, 수업 시간에 무심코 말했다.“어제 혼자 밥 먹었어.”순간, 교실이 술렁였다.“진짜요? 왜요?”“같이 드시지 그랬어요!”“다음엔 저랑 드세요!” 그 반응에피식 웃음이 나왔고,어쩐지 가슴은 살짝 먹먹했다. 아이들은 혼밥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어른들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나치지만,아이들은그런 이야기를 마음의 사건으로 받아들인다.수업을 하며 많은 말을 나눴지만정작 마음이 가까워지는 순간은이렇게 소소한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혼.. 2025. 5. 21.
고무신 한 켤레의 기억 어릴 적, 내 발엔 늘 검정 고무신이 끼워져 있었다.비 오면 물이 고이고,더운 날엔 땀이 배어 미끄러지던 신발.뒤축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걷다 보면 자꾸만 벗겨져저만치 달아나곤 했다. 그런 나에게아버지는 어느 날, 새 고무신을 사주셨다.말은 없었고, 표정도 무덤덤했지만그날 밤 나는검정 고무신을 꼭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그건 나에겐 작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오래가지 않았다.학교에 신고 간 첫날,신발장 앞에 벗어둔 고무신은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니 사라져 있었다.나는 복도 끝까지 울면서 돌아다녔고,선생님도, 친구들도 말이 없었다.다음 날, 아버지는 또 다른 새 고무신을 내밀었다.말없이, 조용히. 지금 생각해보면,그 고무신을 가져간 아이는 누구였을까.그 아이도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녔던 걸까.혹은,아무.. 2025. 5. 20.
아카시아가 피면 떠오르는 얼굴 온 동네에 아카시아 향이 번지기 시작하면나는 어김없이, 그 애를 떠올린다. 5학년 봄,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듯한 아이였다.운동화를 벗으면 양말에 발가락이 비칠 만큼,매일 뛰어다니며 놀았다. 하굣길은 늘 똑같았지만,그날그날의 이유는 달랐다.누군가는 고양이를 따라가고,나는 꽃길을 따라갔다. 아카시아는 언제나 길가에 피어 있었고하얗게 핀 꽃잎 아래서는누구든 시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꽃을 따먹었고,지치면 나무 밑에 드러누워햇살을 똑같이 나눠 가졌다.그날도 그랬다.나는 흙바닥에 앉아아카시아 꽃잎을 손톱으로 반 갈라보고 있었다. 그 애는,서울에서 전학 온 그 애는조용히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말도 없이,아무 이유도 없이.잠시 후, 그 애가 말했다. “이 꽃, 꿀맛 나지 않아? 난 싫던데.” 나는 .. 2025. 5. 19.
추어탕 가는 미꾸라지 나는 미꾸라지다.진흙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고,잡히지 않기 위해 미끄러워졌고,작고 연약해서 늘 숨었다.그런 나에게도, ‘가는 길’이 있다.그 길 끝엔 뚝배기가 끓고 있다. 처음엔 도망치려 했다.물을 흐리며 빠져나가고,그물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게 전부였다.하지만 세상은 어느새모든 출구를 막고,“넌 결국 추어탕이 될 거야”라며 웃었다. 그래서 나는 다르게 결심했다.도망치는 대신, 끓는 냄비로 스스로 들어가기로.흔들어 놓기로 했다.맑아 보이던 물 아래 깔린검고 눅진한 진실을 끄집어내기로 했다. 끓는 물 속에서내 살점은 부서지고,뼈는 가루가 되겠지만,그 국물은 진해질 것이다.그 맛은 누군가의 속을 데우고,한 줌 용기를 삼키게 할 것이다. 나는 소모되는 존재가 아니라,우러나는 존재가 되기로 했다.억눌림을.. 2025. 5. 18.
재촉하지 마요 – 유머 버전 요즘 자꾸 생각이 앞서가요.생각보다 손이 먼저 가고,가만히 있으려 해도 마음이 들썩들썩합니다. “이쯤이면 괜찮지 않아?”“이 정도면 슬슬 열어봐도 되는 거 아냐?”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속에서 한 마디가 울려요. “재촉하지 마요.” 꽃이 피었다고바로 열매를 따는 건 조금 무례하잖아요.예의상 햇살도 좀 더 쬐어줘야 하고,바람도 맞게 해줘야 하고,무엇보다… 익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아직은 살짝 딱딱할지도 몰라요.너무 빨리 건드리면…쓴맛이 날 수 있어요. 🍑 이건 단지 기다림의 미학이 아니라안전 수칙이에요. 좋은 건 천천히 오고,가장 맛있는 건늘 조금 참았을 때 오잖아요?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진짜 달콤한 순간을 맛보게 되죠.그리고 무엇보다,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상상은 가장 무르익는 거 아시죠? 😏 그러.. 2025.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