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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의 아침, 철쭉은 피어 있었다 비가 그친 아침이었다.젖은 도로 위로 햇살이 스며들고고속도로는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차들이 쉼 없이 달리고나도 그 흐름 속에 섞여 있었다. 그때,길 한복판에 작은 비둘기 한 마리가 있었다.몸은 젖어 있었고한쪽 날개는 기이하게 꺾여 있었다.비둘기는 몸을 일으켜보려 애썼다.하지만 날개도, 다리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차들은 그 곁을 지나쳤고내 차도 예외는 아니었다.나는 순간 발을 떼려 했지만곧 다시 액셀을 밟았다. 비둘기는 말이 없었지만그 눈빛은 분명 무언가를 외쳤다."신이시여…"침묵 속의 절규가귓가에 남았다. 백미러 너머작은 몸짓은 점처럼 작아졌다.그리고 이내 사라졌다. 그 길가엔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붉고 화사하게,방금의 장면을 아무 일 없던 듯 덮고 있었다. 오늘 아침,나는 저주받지 않았다.. 2025. 4. 30.
"불꽃 속에서 익어가는 삶, 삼겹살 한 점에 담긴 이야기" 우리는 살기 위해 먹을까.아니면 먹기 위해 사는 걸까. 요즘 세상을 보면,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유튜브, 블로그, TV.온통 음식 이야기다.먹는 것은 이제 문화가 되었고, 위로가 되었고, 삶 그 자체가 되었다. 가족이 모이거나,회사 동료들과 회식이 잡히거나,캠핑을 간다고 하면,자연스럽게 한 가지 음식이 떠오른다. 삼겹살. 불판 위에 고기가 닿는 순간,'치익' —기름이 튀며 눈앞을 스치고,고소한 냄새가 허기를 자극한다. 연기 사이로 퍼지는 숯불 향기,불꽃에 비치는 얼굴들.젓가락에 들린 삼겹살은 미세하게 떨리고,육즙이 안쪽에서 부글거리다 입안에서 터진다. 상추 위에 삼겹살을 얹고,파무침을 올리고,마늘 한 쪽, 쌈장 한 숟가락 얹어입을 크게 벌려 삼킨다.짭짤한 기름맛,쌉싸름한 채소의 향,차가운 맥주 거품.. 2025. 4. 29.
추억은 늙지 않는다, 고향에서 다시 웃다 젊은이는 미래를 먹고 살고,노년은 과거를 먹고 산다.이제 우리는 하루 한 조각, 추억을 씹으며 산다. "야, 너 그때 기억나?"친구의 한마디에잊었던 시간이 살아난다.기억은 다시 풍성해진다. 오늘은 부부 동반 강화도 나들이.친구가 물려받은 한옥집.세 커플, 딱 좋은 숫자. 반질반질한 마루,잔디꽃 흐드러진 마당.오래된 한옥엔 따뜻한 바람이 스민다. "이 친구, 이렇게 깔끔했나?"익숙한 얼굴에서 낯선 면을 본다. 장어와 삼겹살이 불판에서 '치익' 소리 낸다.텃밭에서 금방 딴 상추와 쑥갓.구수한 흙내, 고기 냄새,어릴 적 어머니 부엌이 떠오른다. 맥주잔 부딪히며 웃음이 터진다.추억과 감동이 한데 섞인다.이 순간, 이보다 좋을까. 그때 친구가 툭,"야, 니가 그때 울던거 기억나냐?"모두 웃지만,나는 잠깐 웃음을 .. 2025. 4. 29.
“커피 한 잔으로 위로 받은 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아직 봄은 완전히 오지 않았다.하늘은 맑고 햇살도 따스했지만,나무는 잎을 달지 않은 채 겨울의 마지막을 버티고 있었다.하지만 그 적막함 속에서도 묘하게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그 고요한 순간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캠핑 의자에 기대어, 손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내 옆에는 하얀 SUV 차량과 조그마한 텐트가 있고,작은 나무 테이블 위에는 정갈하게 준비된 도시락과 물 한 병, 종이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주 평범한 풍경일지 몰라도,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다.자연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도시의 소음에서 점점 멀어졌다.이곳에는 시계도, 알람도, 업무 메신저도 없다.오직 나와 바람, 그리고 잔잔한 숲의 숨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살짝 불자 나뭇가지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2025. 4. 25.
“숲속 바위틈에서 눈을 뜬 작은 생명, 가재 이야기” 나는 오래된 숲길을 따라 걷다가, 조그만 옹달샘 앞에 멈춰 섰다.물이 거의 말라 있었지만, 그 자리엔 아직도 생명이 남아 있었다.들리지 않을 만큼 작고 조용한 속삭임이 있었고,그건 아마도 옹달샘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태양은 그날 따라 무겁게 떠올랐다.어딘가 먼 아프리카 땅,백색 해골 목걸이를 두른 마을 위로 이사를 간 듯따스함보다는 묘한 이질감이 먼저 느껴졌다.낯선 햇살 아래, 달빛마저 조용히 절여진 듯한 분위기였다. 오래된 나무는 허리가 굽은 채 꿈을 꾸고 있었다.그 나무는 아무 말도 없었다.나는 그 곁에 앉아 물끄러미 나무를 바라보다가,옹달샘이 더 이상 속삭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생명은 그렇게, 어느 날엔가 멈추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고개를 들자, 낙엽 하나가 내 앞에 .. 2025. 4. 24.
철쭉 그늘 아래,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 운동장 끝자락에서 아이들의 웃음이 봄바람을 타고 출렁인다.공이 튀는 소리, 발끝을 타고 흐르는 경쾌한 외침들.“막아!” “간다!”아이들은 삶의 속도를 잴 줄 모르는 시간 속에서그저 지금 여기를 힘껏 살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 소란스러운 생명들 사이로조용히 산책길을 어슬렁거린다.목적 없는 발걸음은 오히려 충만하고,속도 없는 시간은 뜻밖에 귀하다. 운동장을 에워싼 나무에는 초록잎이 무성하고,그 아래엔 진분홍 철쭉이 무심히 피어 있다.아이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 그늘 속에서철쭉은 아무도 보지 않아도 꿋꿋이 봄을 지킨다.마치 오래전 누군가의 청춘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들면, 하늘 위로 아지랑이가 흐르고눈에 보이지 않는 꽃내음이 코끝을 어지럽힌다.이 계절은 냄새로, 색으로, 소리로우리 마음 어딘가를 비집고 .. 2025.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