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성수필157

“찔레순, 싱아, 칡… 그 시절 산과 들이 주던 건강 간식” 1960년대.그 시절 아이들의 간식은 바람과 흙이 먼저 맛보던 것들이었다.비닐봉지 대신 손바닥에 담았고, 조미료 대신 햇살과 바람이 맛을 내주었다. “천 원어치 주세요”라는 말은 꿈도 꿀 수 없던 시절.대신 우리는, 말없이 눈을 땅으로 내리고 손을 들판으로 뻗었다.배고픔은 때론 놀이였고, 때론 모험이었으며, 늘 자연을 향한 본능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은 늘 조금씩 길어졌다.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싱아 있다!” 외치면, 아이들 여럿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초록빛 줄기를 꺾고 껍질을 벗겨 입에 넣는다.톡—.아삭이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시큼함.눈을 찡그리며 씹다 보면 침이 고이고, 몸속까지 시원해졌다. 너무 많이 먹으면 입안이 헐었지만, 그건 배불리 먹었다는 증표였다.지금도 문득 혓바닥 아래에 그 맛이 .. 2025. 6. 30.
“외유내강, 나는 왜 항상 미안하다고 말할까” 나는 종종, 찬 바람 앞에 선 작은 나무처럼 살았다.겉은 푸르지만, 속은 바짝 긴장한 나무.쉽게 부러지지 않지만,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은 나를 두고 ‘외유내강’이라 했다.겉으론 말없이 웃지만, 속으론 내 기준에 날을 세웠다. “그건 제 잘못인 것 같아요.”“제가 조심했어야죠.”익숙한 말들이었다. 실은 그 말들이 마음을 누른다는 걸뒤늦게 알았다. 나는 상대의 불편함을 먼저 읽는다.대화의 틈, 표정의 굴곡, 숨죽인 분위기. 그러면 내 감정은 자연스레 뒷자리에 앉는다.그리고 ‘괜찮아’를 입에 단다. 아이들과 있을 때는 달랐다.그들은 ‘말보다 마음’을 먼저 읽는 존재였다. 그들과의 시간은 평화였다.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오갔고,감정은 눈빛으로도 전해졌다.그러나 그 평화는 오직 아이들과 있을 때만 가능했다. 성인.. 2025. 6. 29.
“나이 듦이 주는 위로, 놓아주는 법을 배우다” 어릴 적, 나는 손에 힘을 꽉 주고 살아갔다.무엇이든 꽉 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월급명세서, 사랑, 기회, 인정…놓치지 않으려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쥐고 있었다. 그러다 요즘, 문득 내 손이 자꾸 느슨해진다는 걸 느낀다.아니, 그냥 다 펴버릴 때도 있다.그게 바로 나이 든다는 느낌이다. 며칠 전, 물건을 찾다가 낡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젊은 시절, 나는 분명 저기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방향을 몰라 흔들리던 눈빛. 그때의 나는 달리고 있었고,지금의 나는 가만히 서서지나온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요즘 내 시야는 흐릿하다.글씨는 번지고,한 문장을 끝내기 전에 앞줄을 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기억의 색깔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1991년 겨울,엄마가 삶아준 고구마를 손에 쥐여주며 말했.. 2025. 6. 28.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고 나는 버텼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품은 목표가 있다.누군가는 안정된 삶을 꿈꾸고, 누군가는 오래된 사랑을 기다린다.어떤 이들은 증명하고 싶다. 나는 할 수 있다고,어느 자리에 서도 빛나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그 목표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앞에 놓인 길이 뚜렷하지 않을 때도 있고,가까워 보이던 지점이 어느새 멀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날들 속에서,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걷고 넘어지며 다시 일어난다. 예전의 나는 교직에 막 들어선 초임 교사였다.‘이 길이 정말 나에게 맞는 걸까?’스스로를 끊임없이 되묻던 시절이었다.수업 준비에 밤을 새우고도, 아이들의 반응은 뜻대로 오지 않았고,행정 업무에 치이고, 선배 교사들과의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서나는 매일 조금씩 소진되어 갔다. 어느 날은 퇴근길.. 2025. 6. 27.
흐름에 맞서다 – 물살 위 청개구리의 이야기 - 장마의 계절 장마가 시작되면나는 자주 멈춰 서게 된다. 흐름은 삶을 정리하는 듯 보이지만,그 안에는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도로 위를 달리던 차들도,사람들의 바쁜 발걸음도,빗속에 잠깐 멈춰 선다. 그리고 나 역시,멈춰 선다. 물웅덩이 위로 퍼져나가는 동그란 파문처럼,기억이 번진다. 어릴 적,그 흐름의 반대편에서 마주했던작은 생명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잿빛 하늘 사이로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개울을 스치던 날. 개울물은 겉보기엔 고요했지만,바닥 아래서는 소리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걸 알 리 없었다. 고무신으로 접은 돛단배를 띄우며낄낄대던 아이들.그 중 한 아이의 배는 물살에 휩쓸려 사라지고,그 아이는 금세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버드나무 가지 하나가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2025. 6. 26.
꽃을 수놓은 뱀 – 노인의 눈으로 본 진실 지난 초봄, 손주 녀석이 시골에 내려왔다.오랜만에 마당을 함께 쓸고 있던 참이었다. 녀석이 갑자기 뒷걸음치며 소리쳤다.“할아버지, 뱀이에요!” 마당 끝 쑥대 밑, 그곳에 조용히 뱀 한 마리가 몸을 말고 있었다.풀잎 사이로 고개를 들어 혀를 날름거릴 뿐, 공격할 기색은 없었다. 나는 손주의 어깨를 가만히 눌러주며 말했다.“놀랐지? 근데 저놈도 우리 눈치 보고 있는 거야.” 녀석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며“징그러워요”라 했다.나는 그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젊은 시절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이젠 그 말이 마음에 걸린다. 뱀은 오래도록 원죄의 상징이었다.에덴의 유혹자, 독과 음모의 화신. 하지만 생각해보면,그 모든 이미지는 인간이 만든 거다. 뱀은 말이 없다.땅에 몸을 붙이고, 세상과 거리를 두.. 2025.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