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리하다가
손이 멈췄다. 눈가에 붉게 부은 자국이 보였다.
잠을 설친 탓이었다.
그제야 어젯밤 회식 자리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넌 너무 감정을 숨겨. 그래서 좀 피곤해.”
말한 사람은 아무 악의 없이 던졌을 테고,
분위기도 가볍게 웃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말이 집에 와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샤워기 소리에도,
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에도
자꾸 그 말이 섞여 들렸다.
그렇게 나는
말 한 마디에 하루가 금이 갔다.
거울 속 나는 익숙했다.
일할 때 쓰는 정돈된 표정,
어색하지 않게 미소 지을 수 있는 눈꼬리,
피곤해도 버텨낼 수 있는 턱선.
그런데 그날은 그 익숙한 얼굴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속이 빈 채로 껍질만 남은 사람.
거울이 나를 비춘 게 아니라,
내가 거울에 나를 흉내 낸 것 같았다.
사람들은 보통
**“마음이 부서졌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진짜 마음은
그렇게 요란하게 부서지지 않는다.
그보다 더 조용하게,
티 나지 않게 금이 간다.
남들 눈엔 멀쩡해 보여도
스스로만 알고 있는 금.
잘 웃고, 잘 일하고,
인사도 잘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 중.
그리고 그걸 아무도 모르니까
더 고립된 기분이 된다.
나는 한 번도
내 감정을 잘 표현해본 적이 없다.
어릴 적부터
"괜찮아", "아무 일 아냐"
를 입에 달고 살았다.
힘들다는 말을 꺼내는 대신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거나
퇴근길에 이어폰 볼륨을 높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뭘 느끼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 한구석에
찌꺼기처럼 쌓여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밤,
나는 처음으로
거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눈을 마주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눈을 피했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감정을 꺼낸다는 건
약함이 아니라 용기라는 걸,
내 마음을 알아채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상처가 난 곳을 그대로 둔다고
낫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요즘 나는
거울 앞에서 눈을 피하지 않으려 한다.
눈 밑 그늘도, 닫힌 입술도
그대로 마주한다.
그리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속삭인다.
“그 말에 상처받은 거, 괜찮아.
너답게 느낀 거니까.”
이제는 그 말을 버리지 않는다.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것도
내가 나를 돌보는 방식이라는 걸,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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