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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아래로만 흐르지 않는다” 나는 한참을 바라보았다.싱크대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물방울이조금씩 스테인리스 표면을 두드리며 만든 둥근 울림을.물은,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흔든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고 배웠다.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나도 그렇게 살았다.몸을 낮추고, 말끝을 흐리고, 가능한 한 덜 튀는 방향으로. 물은 그게 옳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풀뿌리를 적시고, 나무 뿌리에 스며들고, 자갈 틈을 지나다정한 기척으로만 존재하는 물.나는 그게 ‘지혜’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여름,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증기로 솟구쳐햇살 속에서 반짝이던 순간,나는 알았다.물이 위로도 흐른다는 걸. 보이지 않는 물기둥,그것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일 수도,숨죽였던 소망일 수도 있다.물은 솟는다.산꼭대기에서도, 벌어진 틈에서도,누구도.. 2025. 6. 19.
"한국의 술문화, 왜 사라지고 있을까?" 한때는 나도 매일같이 술자리에 있었다.퇴근 후면 자연스레 호프집으로 향했고, 2차, 3차는 기본이었다.술이 인간관계의 필수라고 믿었고, 취한 김에 나눈 대화가 진심이라 여겼다. 그런 밤들이 반복됐다.술기운에 실수해도 "술 때문이야"라며 웃어넘겼고,아침이면 숙취와 후회가 남았다.그래도 다음 날이면 또 누군가의 "한 잔 어때요?"에 따라나섰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회식도 줄고, 술집도 하나둘 사라진다.예전 같으면 허전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기억에 남는 대화는 술 없는 밤에 오히려 많았다.아내와 공원을 걸으며 나눈 소소한 이야기.아이가 해준 말에 웃었던 저녁.그 시간들이 술보다 더 깊게 내 안에 남았다. 나도 한때는 술로 위안을 삼았다.억울한 일, 지친 하루, 표현 못한 감정들을 술에 기대.. 2025. 6. 18.
“문은 마음 안에 있었다 – 서산 개심사에서” 충남 서산, 개심사.벚꽃이 진 뒤 찾아온 절은소란 대신 깊이를 건넸다. 입구에 서 있는 두 개의 돌비석.장식도, 이름도 없는 이 돌덩이를누군가는 ‘문’이라 불렀다. “이건 여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문입니다.”그 말을 곱씹으며 걸음을 옮긴다.눈앞에 펼쳐지는 고요가천천히 내 안의 소리를 지운다. 우린 늘 눈에 보이는 문만 문이라 여긴다.경첩 없는 문은 없다고 믿고,틀 없는 길은 헤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긴 다르다.젖은 돌바닥, 흔들리는 향냄새,계단 틈에 낀 시간들이 문이 된다.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내가 열리는 곳이다. 계단은 반듯하지 않다.비틀린 돌과 구부러진 나무뿌리가자꾸만 발을 붙잡는다.그 울퉁불퉁함 속에서오히려 중심을 더 또렷이 찾게 된다. 대웅전 앞에선 누구나 말이 없다.한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2025. 6. 17.
단맛보다 깊은 쓴맛, 인생이 내게 알려준 것 사람의 혀는 다섯 가지 맛을 기억한다.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그리고 쓴맛. 그중에서 사람들은 단맛을 가장 쉽게 사랑한다.쓴맛은 불편하고 낯설다.몸에 좋다는 걸 알아도, 입으로 들이는 건 쉽지 않다. 나도 그랬다. 어릴 적 설탕은 귀한 보물이었다.찬장에서 몰래 꺼낸 당원,입안 가득 퍼지던 알사탕 하나가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청년이 된 뒤엔 봉지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설탕과 프림이 듬뿍 섞인 달콤한 커피.한 손엔 담배, 다른 손엔 종이컵.그게 내 하루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커피 자판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던 시절.나는 아마 커피보다는그 안에 녹아 있는 단맛을 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직장 동료가 건넨 아메리카노 한 잔. 첫 모금은 고통이었다.쓴맛은 거칠고, 낯설고, .. 2025. 6. 16.
“봉숭아 꽃잎, 그리고 상처 대신 남긴 색깔” 며칠째 바람이 불었다. 비도 그치지 않았다.마당의 나무가 잎을 떨구며 흔들렸다.잎들은 아직 푸르렀다.떨어지기엔, 마음이 먼저 늙어야 한다는 듯. 그 아래에서 나는 낡은 연장을 정리하고 있었다.날이 무뎌진 전지가위, 덜그럭대는 드라이버,손잡이가 갈라진 톱.젊은 날엔 저것들로 뭐든 만들었다.고장 난 문, 삐걱이는 의자,때론 뒤틀린 관계까지도. 그때의 나는 베는 사람이었다.일을, 말끝을, 감정을.먼저 휘둘러야 살아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남은 건, 자른 것보다도잘린 내 쪽 마음이었다. “아빠!”딸아이가 봉숭아꽃을 양손에 가득 안고 달려왔다.“이거 찧어줘! 우리 손톱에 물들일 거야!” 나는 칼 대신 절구를 꺼냈다.봉숭아꽃을 넣고 찧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툭, 씨가 튀어나왔다.아이들이 웃었다.그 웃음이, 나를 오.. 2025. 6. 15.
신문지 벽과 연탄불, 고바우가 살아있는 식당 세상엔 사라져도 되는 것이 있고, 사라지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바우 영감은 후자다. 신문 모서리에 붙어 있던 네 컷 만화.유쾌하지만 날카롭고, 익살스럽지만 속이 깊었다.그 그림 속에서 어린 나는 세상을 엿보았고, 웃음 속에서 어른들의 현실을 배웠다. 그 시절, 신문은 TV였고 교과서였으며고기 포장지이자, 벽지였고, 때로는 화장실 휴지였다.고바우는 늘 우리 삶의 어딘가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동네 골목에서 익숙한 이름의 간판을 봤다.‘고바우 덩어리 생고기’ 잊고 지낸 친구가 불쑥 나타난 듯한 느낌.오래 지나치기만 했던 그 식당,가족과 함께 처음 문을 열었다. 안은 낡았다.신문지가 벽을 뒤덮고, 연탄불이 피어올랐다.어두운 듯하지만 따뜻한 불빛.기억 하나가 가슴에서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손이 많이 간다... 2025.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