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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

“봉숭아 꽃잎, 그리고 상처 대신 남긴 색깔”

by 선비천사 2025. 6. 15.

 

며칠째 바람이 불었다. 비도 그치지 않았다.
마당의 나무가 잎을 떨구며 흔들렸다.
잎들은 아직 푸르렀다.
떨어지기엔, 마음이 먼저 늙어야 한다는 듯.

 

그 아래에서 나는 낡은 연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날이 무뎌진 전지가위, 덜그럭대는 드라이버,
손잡이가 갈라진 톱.
젊은 날엔 저것들로 뭐든 만들었다.
고장 난 문, 삐걱이는 의자,
때론 뒤틀린 관계까지도.

 

그때의 나는 베는 사람이었다.
일을, 말끝을, 감정을.
먼저 휘둘러야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은 건, 자른 것보다도
잘린 내 쪽 마음이었다.

 

“아빠!”
딸아이가 봉숭아꽃을 양손에 가득 안고 달려왔다.
“이거 찧어줘! 우리 손톱에 물들일 거야!”

 

나는 칼 대신 절구를 꺼냈다.
봉숭아꽃을 넣고 찧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툭, 씨가 튀어나왔다.
아이들이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오래된 무사처럼 멈춰 세웠다.

 

딸아이가 묻는다.
“왜 이건 물들면 안 지워져?”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게... 오래 남으라고 그런가 보지.”

 

아이가 다시 묻는다.
“아빠는 뭐가 제일 오래 남았어?”

 

나는 절구를 멈췄다.
순간, 지나간 얼굴들—
상처 주고 떠난 사람들,
미안하단 말을 늦게 안 나 자신이 떠올랐다.

 

“…말 안 한 것들이.”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딸아이는 붉은 즙이 든 손톱을 내게 보여주며 웃었다.
“이거 첫눈 올 때까지 남으면, 소원 이뤄진대.”
그리고 작은 속삭임처럼 덧붙였다.
“나는… 아빠가 화 안 냈으면 좋겠어.”

 

나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화가 아닌 칼, 말이 아닌 손.
그제야 알았다.
이 아이는 지금, 상처를 물들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붉음이 손톱 위에 고였다.
그건 피가 아니라,
말하지 못한 감정의 색이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아빠도 소원 하나 빌까?”

“응! 뭔데?”
“…이 색이, 우리 둘 다 오래 남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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