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바람이 불었다. 비도 그치지 않았다.
마당의 나무가 잎을 떨구며 흔들렸다.
잎들은 아직 푸르렀다.
떨어지기엔, 마음이 먼저 늙어야 한다는 듯.
그 아래에서 나는 낡은 연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날이 무뎌진 전지가위, 덜그럭대는 드라이버,
손잡이가 갈라진 톱.
젊은 날엔 저것들로 뭐든 만들었다.
고장 난 문, 삐걱이는 의자,
때론 뒤틀린 관계까지도.
그때의 나는 베는 사람이었다.
일을, 말끝을, 감정을.
먼저 휘둘러야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은 건, 자른 것보다도
잘린 내 쪽 마음이었다.
“아빠!”
딸아이가 봉숭아꽃을 양손에 가득 안고 달려왔다.
“이거 찧어줘! 우리 손톱에 물들일 거야!”
나는 칼 대신 절구를 꺼냈다.
봉숭아꽃을 넣고 찧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툭, 씨가 튀어나왔다.
아이들이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오래된 무사처럼 멈춰 세웠다.
딸아이가 묻는다.
“왜 이건 물들면 안 지워져?”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게... 오래 남으라고 그런가 보지.”
아이가 다시 묻는다.
“아빠는 뭐가 제일 오래 남았어?”
나는 절구를 멈췄다.
순간, 지나간 얼굴들—
상처 주고 떠난 사람들,
미안하단 말을 늦게 안 나 자신이 떠올랐다.
“…말 안 한 것들이.”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딸아이는 붉은 즙이 든 손톱을 내게 보여주며 웃었다.
“이거 첫눈 올 때까지 남으면, 소원 이뤄진대.”
그리고 작은 속삭임처럼 덧붙였다.
“나는… 아빠가 화 안 냈으면 좋겠어.”
나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화가 아닌 칼, 말이 아닌 손.
그제야 알았다.
이 아이는 지금, 상처를 물들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붉음이 손톱 위에 고였다.
그건 피가 아니라,
말하지 못한 감정의 색이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아빠도 소원 하나 빌까?”
“응! 뭔데?”
“…이 색이, 우리 둘 다 오래 남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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