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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157

봄비, 자벌레의 꿈에 물들다 봄 하늘을 훔쳐간 구름이어디선가 조리개를 열었다.높새바람 따라물줄기들이 사뿐히 쏟아진다. 삭정이 틈 사이,겨울을 견딘 껍질이 슬며시 벌어지고그 아래서 작은 신음이 움튼다. 풀빛 자벌레는몸을 말고 있던 꿈을 펴며조심스레 고개를 내민다. 하늘은그 긴 사연들을이 봄비에 실어 보내는 걸까. 계산되지 않은 계절의 방문,갑작스러운 빗속에서나는 우산을 접는다. 그리고 묻는다.왜 하필 지금내 마음을 건드리는 건지. 아아—오늘은,정말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2025. 5. 15.
장(腸) 속에도 길이 있다 곱창집 가는 길.배고픈 것도 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들뜬다.보글보글 냄비 소리, 매캐한 연기,입 안에 먼저 차오르는 양념 냄새.곱창은 그냥 음식이 아니다.사람 뱃속에서 꺼낸 것과 같은 그 구불구불한 걸,정성껏 손질해 다시 먹는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몸속엔 소장도 있고 대장도 있다.음식은 그 길을 천천히 돈다.그 여정은 조용하지만, 참 중요하다.곱창을 씹으며 문득 든 생각—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빠르게 사는 세상.고속도로처럼 쌩쌩 달리다 보면정작 풍경 하나 눈에 안 남는다.곱창도 급하게 먹으면 느끼하고 체한다.삶도 그렇다. 천천히 씹어야 진짜 맛이 난다. 어릴 적, 아버지와 간 시장 골목 곱창집이 떠오른다.숟가락으로 국물을 퍼주시던 손,“느끼해도 끝에 맛이 있다”던 말.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 2025. 5. 14.
착하게 살아서 남은 것 초등학교 때 일이었다.누군가 내 필통을 훔쳤다.울고 있던 내게 선생님은 말했다.“그래도 ○○는 착하잖아. 그냥 참자.” 그 말이 위로로 들리지 않았다.억울한데도 참아야 한다는 말.그게 착한 거라면,나는 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릴 적 나는 착하다는 말이 좋았다.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벅차고,스스로 괜찮은 사람 같았다.흥부처럼 살면 복이 온다 했고,착한 사람은 결국 웃는다고 배웠다. 그래서 양보했고,조용히 참았고,항상 맞춰줬다. 하지만 세상은 달랐다.양보하는 사람은 뒤로 밀리고,참는 사람은 무시당했다.욕심 많은 사람이 원하는 걸 가져갔고,소리 내지 않는 사람은 잊혔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이렇게 살아서 뭐가 남지?’‘나는 왜 늘 착해야 하지?’ 심리학자들은 그걸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2025. 5. 13.
돈, 내 안의 그림자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나에게 통장을 하나 건넸다.“네 이름으로 된 거야. 이제부터는 네가 벌어야 해.”말은 담담했지만, 그 말의 무게는 오랜 시간 내 마음을 눌렀다.통장 속엔 몇 십만 원의 잔고와 함께, 내가 앞으로 책임져야 할 '삶'이 들어 있었다.그날 이후, 돈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세상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실처럼 느껴졌다.때로는 얇고 투명했으며, 때로는 목을 조일 만큼 질겼다. 돈은 나를 성장시켰다.아르바이트로 처음 받은 월급은 교과서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그 안에는 손님의 불평, 사장의 눈치, 그리고 내 몸의 피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통장 잔고가 늘어날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기보단 무거워졌다.마치 발밑에 쌓이는 모래주머니처럼.돈은 내 자유를 담보로 .. 2025. 5. 13.
나는 정말 나의 것일까 TV 리모컨을 들었다가문득, 멈췄다. 아무 소리도 없는 방 안.창밖으로는 택배 트럭 소리,누군가 퉁명스레 닫는 현관문 소리.그 소음들이 파도처럼 멀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셔츠, 내가 만든 걸까?책상도, 냉장고도, 텔레비전도모두 누군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것. 내 몸은 어떨까.피부와 뼈, 눈동자까지모두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이건 내 것이 아니구나. 머릿속 지식들도책에서 온 말, 누군가의 생각.곱씹을수록 빌려온 것들뿐이다. 그럼 진짜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뭘까? 아마도,혼자일 때 떠오르는 생각들.누구에게 배운 적 없는 문장들.그것들이 내 안에서 자라는 걸까? 하지만,그 생각조차 욕망과 두려움에 흔들린다.육체는 날 배신하고,나는 나를 낯설게 본다. 부끄러웠다.무엇 하나 온전히 나의 것이라.. 2025. 5. 13.
백두산 정경 – 눈꽃 한 점의 기억 백두산 자락에 섰다.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였다. 말없이 눈을 굴리던 녀석이갑자기 눈덩이를 던졌다.“야, 그때 우리 교복 입고 눈싸움하던 거 기억나냐?”한 마디에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다시열일곱이었다. 하지만 눈밭 위에 남겨진 발자국처럼세월은 분명히 지나 있었다.누군가는 무릎을 만졌고,누군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그래도 오길 잘했다.” 백두산은 여전히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산 위로는 구름이 흘렀고,그 속에는우리의 젊은 날들이 둥둥 떠 있었다. 쌓인 눈, 흩날리는 입김,덜 굳은 주름살 아래 숨어 있는소년의 얼굴들.그때의 우정은시간이 아니라 마음에 쌓였던 것이다. 바람이 지나갔다.그 속에 들꽃 향기가 섞여 있었다.누군가 말 없이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나는 생각했다.이 설산은 앞으로 몇.. 2025. 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