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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157

산골 빈집에서 꺼낸 ‘사랑해’의 무게 언젠가 꼭 다시 와야지.그렇게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만 되뇌던 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래였고, 그 뒤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그 골짜기를 나는 느닷없이 걷고 있었다.햇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흩어졌고, 낙엽은 발끝에서 바스락거렸다.숨을 고르며 산길을 따라 내려가자, 기억 속 집이 그대로 거기 있었다. 낡은 흙벽집은 지붕이 기울고, 벽엔 오래된 금이 퍼져 있었다.그럼에도 이상하게, 집은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두 개의 버팀목이 허공에 떠 있었다. 땅에도 닿지 않은 채, 공중에서 집을 받치고 있었다.현실 같지 않은 광경이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그보다는…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집 주위는 조용했다.참죽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스치고, 다람쥐 한 마리가 담장 너.. 2025. 5. 31.
「잡히지 않아 더 진짜인 것들」 요즘, 내 마음은 바람 같다.눈에 보이지 않지만, 스쳐 지나가며 흔적을 남긴다.때로는 빛처럼 따스하고,때로는 그림자처럼 서늘하다. 아침엔 괜찮다가,낮엔 이유 없이 가라앉고,저녁엔 말이 많아진다. 왜 그럴까.내 마음인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말을 걸면 고개를 돌리고,달래면 더 깊이 숨는다.마음은 바람처럼 불다가, 멈췄다가,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아선다.내가 아니라고 말해도,마음은 이미 다른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카페 유리창 너머,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다문득, 눈물이 났다.아무 이유 없이.그냥, 마음이 그랬다.“슬프지 말자.” 해도슬픔은 속삭이듯 찾아오고,“잊자.” 해도기억은 더 또렷해진다. 마음을 부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몇 번이나 생각했다.하지만 마음은,기계가 아니다.그래서 울음은 더 진짜.. 2025. 5. 27.
소무의도 산책과 물회 한 그릇, 여름이 시작되었다 아직 5월 중순인데, 햇살은 벌써 여름을 닮았다.바람 끝에도 봄의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따가운 기운이 먼저 느껴진다.그럴 때였다. “이번 주 토요일, 영종도로 물회 먹으러 가자.”오랜 친구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움직였다.장소는 바다 가까운 물회집, 이름도 근사했다. 선녀풍.마치 선녀들이 바닷물로 회를 말아주는 듯한 이름.웨이팅이 길다던 말도 설레게 들렸다. 도착한 물회는 바다 그 자체였다.넓은 유리 그릇에 담긴 육수는 짙푸르고 시원했다.생선회는 오이, 배, 미역 사이를 유영하듯 흩어져 있었고,그 위로 고소한 참기름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한입.혀끝이 먼저 놀라고, 속이 서늘해지고, 머릿속까지 맑아졌다.그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입 안에서 여름이 깨어났다.어릴 적 바닷가가 떠올랐다.발에 모래를 묻히고 조.. 2025. 5. 25.
“닫힌 문 앞에서, 나는 멈췄다” – 문은 닫혀 있었고, 나는 비로소 나를 들여다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나도 그랬다.언젠가 도착할 줄 알고, 오늘을 견디며 달렸다.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일상은 늘 허탕 쪽이었다.물처럼 빠져나가는 시간들.잡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어떤 것들. 내가 다니는 병원이 있다.멀다. 편도 한 시간 넘게 걸린다.그래도 간다.그곳 의사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분이다.진단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그런 사람. 그날도 그랬다.바쁜 평일, 빗길을 뚫고 병원에 도착했다.문은 닫혀 있었다.유리문에 붙은 종이 한 장, “휴진입니다.”순간 멍해졌다.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기대, 피로, 자책이 섞여 있었다.진료카드를 쥔 손에 힘이 빠졌다. ‘또 허탕이구나.’ 돌아오는 차 안, 빗소리만 들렸다.라디오는 .. 2025. 5. 24.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학생들의 눈을 먼저 봤을 겁니다 ― 한 퇴직 교사의 이야기 퇴직 후, 아내와 함께 저녁 식탁에 앉으면 가끔 되묻습니다.“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어요?” 아내는 단호합니다.다시 태어난다면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법조인이든 의사든, 이름값 있는 직업을 가졌을 거라고요.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결국 인생에서 많은 것을 좌우한다는 걸이제야 실감한다고요. 그 말을 들을 때면 나도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예전의 나였다면 출세나 성공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나는 다시 교단에 서서, ‘진짜 교사’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30여 년간 교직에 몸담았습니다.책상 위 시험지보다 아이들 눈을 더 먼저 봤어야 했는데,늘 업무와 평가에 쫓기며진짜 중요한 것들을 놓친 날이 많았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엎드린 채 수업을.. 2025. 5. 23.
선생님이 빗자루를 든 이유, 아이들은 몰랐겠지만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 한쪽에서오래된 탈무드 책 한 권을 무심코 펼쳤다. 짧은 이야기들 중이상하게 마음을 오래 붙잡은 장면이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랍비에게 물었다.“제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진리를 말씀해 주세요.” 랍비는 주저 없이 답했다.“네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단출한 문장이었지만,그 말은 조용히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기 전에‘내가 먼저 해볼 수 있을까?’를 떠올리게 된 건. 담임이 되어 아이들과 지낼 때도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었다.청소 시간이 되면교사라는 이유로 지시만 하기보다는함께 손을 움직이는 게 내겐 익숙했다. 걸레를 들고 창틀을 닦고,구석의 먼지를 털고, 쓰레기도 함께 버렸다.그러던 어느 .. 2025.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