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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

선생님이 빗자루를 든 이유, 아이들은 몰랐겠지만

by 선비천사 2025. 5. 22.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 한쪽에서
오래된 탈무드 책 한 권을 무심코 펼쳤다.

 

짧은 이야기들 중
이상하게 마음을 오래 붙잡은 장면이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랍비에게 물었다.
“제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진리를 말씀해 주세요.”

 

랍비는 주저 없이 답했다.
“네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단출한 문장이었지만,
그 말은 조용히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해볼 수 있을까?’를 떠올리게 된 건.

 

담임이 되어 아이들과 지낼 때도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었다.

청소 시간이 되면
교사라는 이유로 지시만 하기보다는
함께 손을 움직이는 게 내겐 익숙했다.

 

걸레를 들고 창틀을 닦고,
구석의 먼지를 털고, 쓰레기도 함께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옆에 있었는데,
고개 숙이고 청소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교실이 조용해져 있었다.

 

슬며시 고개를 들면,
바닥엔 쓰다 만 걸레가 나뒹굴고
아이들은 그림자처럼 사라져 있었다.

 

“이 녀석들 또 살금살금 도망간 거지...”

 

순간 허탈함이 밀려왔지만,
곧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졌다.

 

얄밉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도망간 아이들도, 남은 나도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싶었다.

 

그렇게 혼자 남아 청소를 하면서,
단지 바닥만 닦은 게 아니었다.
마음 구석 어딘가도 조용히 정돈되고 있었다.

 

그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됐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방식을 고수했다.
랍비의 그 말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꺼리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억지로 시키지 말자.”

 

지금도 가끔 그런 순간이 오면
잠시 멈춰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이건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이야?”

 

그 질문 하나가
나를 덜 무겁게, 덜 뻔뻔하게 만들어준다.

 

진리는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걸레를 들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을 닦아내는 마음,
그 안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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