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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겨자씨 만큼 살다 보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한 번 크게 흔들려 무너지고 나면, 바닥에 닿을 줄 알았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은 없겠지 싶었다. 그런데 삶은 생각보다 깊었다. 한 번 무너진 줄 알았는데, 그 밑에 또 다른 무너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우울이라는 낯선 집에 살았다. 처음엔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날마다 조금씩 꺼져가는 마음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고, 웃음은 점점 어색해졌다.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바라볼 힘조차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져내렸다.그런데 신기하게도 끝은 없었다. 삶은 ‘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대신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무언가를 내 앞에 밀어놓았다. 어떤 날은 따뜻한 말 .. 2025. 4. 16.
아지랑이처럼, 그녀 열 살쯤 더 늙은 지금, 문득 그녀를 다시 만났다. 봄 햇살이 들판을 어루만지는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다시 마주한 그녀는 여전히 아지랑이 같았다. 눈앞에 있는데 손에 닿지 않는, 가까이에 있어도 어디론가 흩어지는. 우리는 헤어졌고, 꽤 오래도록 각자의 시간을 살아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우리 사이의 거리를 멀게 하지 못했다. 어쩌면, 떨어져 있었기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리움이라는 건 이상하게도, 부재 속에서 더 진해지니까. 그녀는 언제나 내 마음 어딘가에서 하늘거리고 있었다. 봄날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했다. 말간 웃음, 가벼운 말투, 그리고 늘 나를 한발 물러서게 하는 그 특유의 거리감까지. “이젠 그만 잊으라”는 말도 웃으며 내뱉는다. 하지만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2025. 4. 16.
꽃이 길을 만든다 매일 우리는 길을 나선다.학교로, 일터로, 혹은 잠시 마실삼아.늘 같던 골목, 변함없는 신호등, 무심히 스쳐 지나던 건물들.그 일상이 어느 봄날, 조용히 바뀐다. 문을 열고 나선 순간,벚꽃이 세상을 점령한 듯 피어 있다.나무마다 소복소복 꽃이 올라앉고,그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흩날릴 땐마치 하늘이 웃고 있는 것만 같다. 참 신기하다.그저 걸어가던 길이어느새 동화 속 풍경이 되어 있다. 사람들은 오늘도 이 길을 걷는다.하루에도 수천, 수만의 발걸음.그 중 누구는 걸음을 늦추고,누구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누구는 말없이 바라보다,잠시 웃는다. 나는 생각해본다.그 미소 하나, 따뜻한 감정 하나.그 작은 조각들이 모이면이 세상도 조금은 순해질 수 있을까. 화내던 말투가 조금 누그러지고,굳었던 이마에 여유.. 2025. 4. 16.
🐸"개구리가 사람잡네"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세상에서 초봄, 부슬비 내리는 날.무논 한 자락에서 알알이 까맣던 게 꿈틀거렸다.몸통도 아닌 게 통통, 꼬리 하나 달랑 흔들며논 물 위를 쓱쓱 미끄러져 다니던 그놈들. 참말로 순했다. 입도 작고, 배도 말캉말캉해서누가 잡아도 "으응…" 소리 한 번 못 내던 올챙이들.콩알만 한 몸뚱이에,콧구멍 두 개, 대롱입 하나.그거면 세상 다 가진 줄 알았던 때가 있었지. 그 시절엔 두엄 냄새도 고소했다.물밑에서 쉴 새 없이 꼬리질하며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벼 잎 사이로지나가는 참새 그림자 보고 놀라기도 하며,그렇게 천진하게 살던 때였다. 그런데 말이지…풀쩍 뛰고 싶은 마음이 간질간질한 거야.뒷다리가 스멀스멀 돋더니,조막손까지 따라 붙더라고.그리고는, 꼬리를… 잘라버렸지 뭐냐.꼬리 잘랐던.. 2025. 4. 16.
호미로 밭을 매던 어머니, 우리 마음속을 여전히 일구시네 – 어떤 생의 흔적에 바칩니다 어머니가 꽃상여를 타셨다.벚꽃과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봄날,나비들은 아지랑이 사이로 꽃과 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상여소리가 구성지게 울리고,자식들이 여비를 새끼줄에 끼워 넣자꽃상여는 꿈결처럼 흔들리며 북망산으로 향했다.상여꾼들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어깨에 메고,힘든 줄도 모르고 소리꾼의 가락을 따라가며 후렴을 되뇌었다. 오늘은 동네잔치 같았다.상여 뒤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뒤따라오는 동네 개들,잡은 돼지는 튼실한 놈으로,부침개와 전도 풍성히 마련했다. 이날만큼은모두가 어머니를 기억했다.살아생전 그렇게 힘들게 하시던 아버지도붉어진 눈으로 조용히 상여 뒤를 따르셨다. 저승은 말이 없다.이승에서 할 수 있는 일은그저 미지근한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는 것뿐.사람들은 이 .. 2025. 4. 16.
이제, 정든 학교를 떠납니다 32년 전, 저는 작은 두 발로 이 교정에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그때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법도 몰랐고,언제 칠판을 닦아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아이들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숨 쉬듯 교실로 향했고,가르친다는 이름으로,배우는 나날이었습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습니다.계절이 몇 번 바뀌는 사이,저는 이 교정에서 젊음을 묻고,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늙었습니다. 교실 한켠의 책상 위에는지나간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고,교무실의 웃음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그 모든 날들이,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심신이 지쳐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가르침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지만,이제는 나의 자리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때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담담히 이 길을 떠나기로 했.. 2025.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