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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157

가을엔 여행을 떠나겠어요 – 마음을 비우는 계절의 길 위에서 여름은 불덩어리 같았다.햇살은 매정했고, 땀은 등줄기를 따라 끝없이 흘렀다. 그 무거운 열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열망이든, 청춘이든, 혹은 사라져가는 시간이든. 그렇게 한 계절을 건너오니,어느새 가을이 조용히 문을 열고 서 있었다. 가을은 묘하다.봄처럼 들뜨지도 않고, 여름처럼 타오르지도 않는다.그렇다고 겨울처럼 무겁게 내려앉지도 않는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불현듯 가슴에 작은 떨림을 심어준다. 이마의 주름을 어루만지며,가을은 속삭인다. “이제는 덜어낼 때다.” 나는 가볍게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목적지가 뚜렷하지 않아도 좋았다. 풍경을 보려는 여행이 아니라,마음을 비우려는 여행이었으니까. 버스 창밖으로는아직 여물어가는 들녘이 흘러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벼 이삭,연두빛을 .. 2025. 8. 28.
김치는 익는다, 마음도 그렇다 겨울이 오면마당 한켠 장독대가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킨다.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해,나는 어린 손으로 배춧잎 사이를 열심히 벌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고무장갑 낀 손이 익숙하게 양념을 버무릴 때마다,김칫속의 붉은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말은 없었지만,김장을 하는 그날은집안 전체가 말없는 약속을 지키는 듯했다. 기다림의 계절이 온 것이다.어머니는 강화도 사람이다. 갯벌에서 나는 굴과 새우젓,석모도에서 건너온 젓갈로 김치를 담갔다. 강화의 바람은 매서웠지만,그 속에서 자란 채소는 야무졌다. “강화 배추는 아삭하고 단단해서 김장에 딱 좋아.”어머니는 매년 이맘때면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나는 시간이 꽤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김치는 시간이 만드는 음식이다. 처음에는 짜고 맵고 날것 같지만,시.. 2025. 8. 27.
깍두기 인생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늦은 오후였다.햇살이 처마 끝을 타고 대청마루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 햇살을 등에 지고 누워,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깍둑, 깍둑…” 칼이 도마를 치는 소리.무가 썰려 나가는 소리. 그건 단순한 부엌의 소리가 아니라,내 유년을 통과해온 어떤 음악이었다. 느긋하고, 단정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어머니의 하루.깍두기를 담그는 그 소리가 마치 마음을 절여 가는 듯했다.어머니는 무를 한결같은 크기로 썬다.고춧가루, 마늘, 새우젓을 정성껏 넣고무를 버무릴 때의 손길은 단순한 요리라기보다는무언가를 키우고, 달래는 모습 같았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문득 내 인생을 떠올렸다.나는 깍두기를 좋아한다. 새콤한 기운과아삭한 식감. 뜨거운 설렁탕에 그 하나만 얹어 먹어도온몸이 풀리는 기분이다. 깍두기가 맛있으면 국.. 2025. 8. 26.
"라면 한 그릇에 담긴 인생, 그리고 나만의 끓이는 방식" – 일상 속 작은 위로, 그 너머를 보다 하루를 삼켜버린 저녁,허기를 안고 부엌으로 향한다.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는 찬장의 한켠.그곳엔 라면이 있다. 어릴 적 소풍날 새벽,엄마가 끓여주던 김치라면의 냄새부터,스무 살 자취방 첫날 라면 물을 넘기며 웃던 기억까지. 라면은 늘나보다 먼저 거기 있었다.누군가에게 라면은 음식이고,또 누군가에게는 ‘의식’이다. 냄비에 물을 붓는 짧은 순간에도사람마다 방식이 다르다. 면을 먼저?스프를 먼저?계란은 풀까, 말까? 소소한 차이 같지만,그 속엔 그 사람의 성격, 취향,그리고 삶의 방식이 녹아 있다.나는 물이 끓기 전,스프를 반만 먼저 넣는다. 면이 퍼지기 전,탱탱할 때 불을 끈다. 마지막엔 김치로 칼칼함을 더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그건 내 방식이 되었.. 2025. 8. 25.
언어가 무기가 될 때 — 말이 만드는 편가르기 언어는 본래 다리를 놓기 위해 태어났을 것이다. 내 말이 그대에게 닿아 그대의 말이 되고,그대의 말이 내게 와서 나의 말이 되는 순간,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건넌다. 말은 그 다리 위를 오가는 발자국이다.어린 시절 친구에게 건넸던 서툰 인사.엄마가 새벽에 속삭이듯 해주던 위로.그 말들이 내 안에 불을 켰다.언어는 작은 등불이었다.그러나 어느 날부터 언어는 다리보다 돌멩이에 가까워졌다. 회사 회의 자리에서 나는 의견을 내었고,동료가 맞장구를 쳤다.그 순간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말들이 모여 제3자를 향할 때,언어는 이미 ‘우리의 말’이 되어 있었다.더 이상 나의 것도, 동료의 것도 아닌,하나의 깃발. 그 깃발은 누군가를 향해 휘둘려졌다.언어가 무기로 변하는 순간이었다.큰 언어는 목소리가 크다.뉴스의 헤드라.. 2025. 8. 24.
캘리포니아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나무가 말하는 길 어느 날, 서부로 향하던 개척자들이 길을 잃고 사막을 헤매고 있었다.모래바람은 시야를 가리고, 지친 발은 모래에 푹푹 꺼졌다. 그때 그들의 눈에, 이상한 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가리키듯, 팔을 들어 올린 채 서 있었다. 지친 이들 가운데 누군가 속삭였다.“저건 여호수아 같아. 두 팔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 말이야. 그 이름은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Joshua Tree. 세월이 흘렀어도, 사람들은 그 나무 앞에서 멈춰 선다.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나무껍질에 손을 얹은 채 한참을 서 있다.말로는 다 하지 못한 소원을 속으로 흘리며. 사막의 바람은 여전히 뜨겁고 메마르지만,나무는 묵묵히 두 팔을 벌린다.기도와 길 찾기가 어쩌면 같은 말이라는 듯. 2025.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