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 속 작은 위로, 그 너머를 보다
하루를 삼켜버린 저녁,
허기를 안고 부엌으로 향한다.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는 찬장의 한켠.
그곳엔 라면이 있다.
어릴 적 소풍날 새벽,
엄마가 끓여주던 김치라면의 냄새부터,
스무 살 자취방 첫날 라면 물을 넘기며 웃던 기억까지.
라면은 늘
나보다 먼저 거기 있었다.
누군가에게 라면은 음식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의식’이다.
냄비에 물을 붓는 짧은 순간에도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다.
면을 먼저?
스프를 먼저?
계란은 풀까, 말까?
소소한 차이 같지만,
그 속엔 그 사람의 성격, 취향,
그리고 삶의 방식이 녹아 있다.
나는 물이 끓기 전,
스프를 반만 먼저 넣는다.
면이 퍼지기 전,
탱탱할 때 불을 끈다.
마지막엔 김치로 칼칼함을 더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건 내 방식이 되었고,
내 삶의 맛이 되었다.
누군가와 함께 라면을 끓이면
작은 냄비 안에서
조용한 대화가 시작된다.
"넌 이렇게 끓이는구나."
"나는 다르게 해."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관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라면은
맛보다 순간을 먹는 음식이다.
군대의 겨울밤,
야근 끝 새벽,
자취방 첫날의 고요한 허기.
그 국물 한 모금이
그 어떤 말보다 따뜻했던 시간.
아마 라면은
배보다 마음을 더 먼저 채우는 음식일지 모른다.
물론 요즘 라면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이 많다.
하지만,
지친 하루 끝에 끓여낸
뜨거운 한 그릇은
숫자로는 측정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김이 피어오르는 라면 그릇 위로
기억들이 겹겹이 쌓인다.
소리 없이 퍼지는 면발처럼
삶도 그렇게 익어갔다.
어느 조용한 밤,
작은 부엌,
그리고 말없이 건네던 젓가락 하나.
우린 모두
같은 라면을 먹고 있었다.
라면은
끓는 물 위에서 삶을 닮아간다.
서두르면 설익고,
늦으면 탱탱함이 사라진다.
타이밍은 중요하고,
나만의 방식은 더 소중하다.
라면을 끓인다는 건
오늘을 내 방식대로 살아냈다는 증거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라면을 끓인다.
허기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을
채우기 위해.
물이 끓고,
면이 풀어지고,
스프가 퍼지는 이 조용한 풍경 속에서
나는 안다.
오늘도 잘 살았다는 걸.
내 삶이 아직
따뜻하다는 걸.
*관련글 보기
'감성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치는 익는다, 마음도 그렇다 (101) | 2025.08.27 |
---|---|
깍두기 인생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77) | 2025.08.26 |
언어가 무기가 될 때 — 말이 만드는 편가르기 (71) | 2025.08.24 |
캘리포니아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나무가 말하는 길 (46) | 2025.08.21 |
나는 땡돌이입니다 (82) | 2025.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