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면
마당 한켠 장독대가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킨다.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해,
나는 어린 손으로 배춧잎 사이를 열심히 벌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고무장갑 낀 손이 익숙하게 양념을 버무릴 때마다,
김칫속의 붉은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말은 없었지만,
김장을 하는 그날은
집안 전체가 말없는 약속을 지키는 듯했다.
기다림의 계절이 온 것이다.
어머니는 강화도 사람이다.
갯벌에서 나는 굴과 새우젓,
석모도에서 건너온 젓갈로 김치를 담갔다.
강화의 바람은 매서웠지만,
그 속에서 자란 채소는 야무졌다.
“강화 배추는 아삭하고 단단해서 김장에 딱 좋아.”
어머니는 매년 이맘때면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시간이 꽤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김치는 시간이 만드는 음식이다.
처음에는 짜고 맵고 날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신맛 속에 감칠맛이 피어난다.
발효라는 단어는 마치 인생 같다.
서두를수록 어긋나고, 기다릴수록 무르익는다.
김치는 단지 저장식품이 아니라,
시간을 대하는 태도이자,
느림의 철학이다.
강화 김치에는 갯내음이 묻어 있다.
잘게 다진 굴, 새우젓의 짭조름함,
배추 줄기 사이에 배인 바다의 맛.
나는 그 맛이 익숙했다.
어릴 적, 외갓집에서 김장하는 날이면
갯가에 다녀온 어른들의 손에
비닐봉지 가득 굴이 들려 있었다.
어머니와 이모들은 배춧속에 굴을 넣으며
“이게 들어가야 참맛이 난다”고 웃었다.
그 웃음은 바람에 실려
김칫속처럼 깊게 배어들었다.
김치는 시간이 지나며 발효된다.
마치 우리의 관계처럼.
처음엔 알싸하고 자극적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진다.
그 익어가는 시간은
음식의 발효이기도 하지만,
삶의 발효이기도 하다.
이민을 간 친구가
“한국 음식 중에서 김치가 제일 그립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단지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정서의 향수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종종 김치를
찌개로, 전으로, 볶음밥으로 바꿔가며 먹는다.
묵은지는 돼지고기와 함께 끓이면
세상에 없는 맛이 된다.
김치는 버려지는 법이 없다.
시간이 지나도,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귀해진다.
그래서일까.
내게 김치는 익어가는 마음의 상징이다.
요즘은 김치를 마트에서 사는 경우가 많다.
나도 가끔 그렇게 한다.
하지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김치는
냉장고 맨 아래칸에 묵혀둔,
어머니가 강화에서 보내주신 김치다.
봉지를 여는 순간,
그 속에서는 바다와 밭,
그리고 정성이 함께 피어난다.
김치는 음식이 아니라,
말 없는 마음이다.
세계인이 김치를 좋아하게 된다는 말이 들려올 때면
나는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바란다.
김치의 맛뿐 아니라,
그 안에 녹아 있는 ‘기다림’과 ‘정성’까지도
함께 전해지기를.
발효는 단순한 과학이 아니라
문화이고, 관계이며,
시간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김치는 단순히 배추에 양념을 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버무리고,
시간을 절이고,
마음을 삭히는 일이다.
한 포기의 김치에는
어머니의 손끝이 담겨 있고,
그 속엔
갯내음과 겨울 햇살,
강화의 바람까지도 스며 있다.
그래서 김치는
누구에게나 각자의 이야기가 된다.
나는 이제 안다.
김치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입맛을 즐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익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위이며,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발효된 시간 속에
삶의 온기가 묻어난다.
그리고 나는
그 따뜻함으로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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