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오후는 유난히 느렸다.
신호등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급할 것도 없으면서 괜히 서두르는 얼굴, 조금이라도 빨리 지나가고 싶은 얼굴.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때 길을 건너던 노인이 보였다.
허리는 거의 반으로 접혀 있었고, 몸은 바람에 밀리듯 흔들렸다. 지팡이는 없었다. 지팡이를 들 힘조차 아껴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나도 고개를 살짝 돌렸을 뿐이다.
맞은편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차림은 단정했다. 외투는 깨끗했고, 머리도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오래된 옷이었을지 몰라도 흐트러짐은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서도 유독 또렷하게 서 있었다.
노인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각이 딱 맞지는 않았다. 손끝이 살짝 떨렸고, 허리도 완벽하게 숙여지지는 않았다. 그 어정쩡함이 오히려 진짜 같았다. 꾸며진 친절이 아니라, 평소의 태도가 그대로 나온 인사처럼 보였다.
나는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름은 분명 있었지만, 정돈된 표정 속에는 삶이 깔끔하게 정리된 느낌이 있었다. 늙음보다 먼저 보인 것은 태도였다. 오래 살아왔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과시하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말은 낮았고 짧았다.
하지만 노인은 멈췄다. 아주 잠깐, 시간이 멎은 것처럼. 그리고 굽었던 등이 조금 펴졌다. 정말 아주 조금이었다. 그 변화는 주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만 봤다. 아니, 봤다고 믿고 싶었다.
그 순간 나는 불편해졌다.
나는 왜 저 말을 하지 못했을까.
왜 늘 마음속으로만 이해하고, 몸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언젠가 나도 저렇게 등을 굽히고 길을 건널 텐데, 지금의 나는 너무 쉽게 지나쳐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 괜찮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외면하며 살고 있다.
아직 젊다는 핑계로, 아직 바쁘다는 변명으로. 계절이 바뀌는 것도, 얼굴이 달라지는 것도 애써 보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만 간다. 빨리 가는 것이 살아 있는 증거인 것처럼.
그 미소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춘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봄 하나를 꺼내본다.
누군가를 똑바로 바라보던 시절, 마음부터 단정하던 시간.
나는 그 미소 앞에서 잊었던 봄을 다시 꺼내본다.
예쁨이란 나이와 상관없다고
오늘따라 참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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