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목 끝에 오래된 집이 하나 있다. 대문은 떨어져 나갔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릎까지 자라 있다. 낮에는 그저 방치된 빈집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창문 하나가 유난히 검게 남는다. 불이 꺼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켜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창이다. 나는 그 앞을 여러 번 지나쳤다. 어느 날은 발걸음이 멈췄다. 그날 아침, 학교에서 내 몫이 아닌 업무까지 떠안았고, 저녁 약속은 취소했다. 휴대전화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 있었지만 답장을 보낼 기운이 없었다. 사람들 속에 있었지만 하루 종일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면 불은 내가 켜야 했고, 텅 빈 방은 내가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저 창 안에도 불을 켜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불을 켤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을까. 그 어둠이 낯설지 않았다.
몇 달 전, 나는 상담실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예약을 해놓고도 여러 번 취소할 뻔했다. “이 정도는 다들 견디지 않나.” “나는 특별히 힘든 것도 없는데.” 그 말들은 합리화가 아니라 방어였다. 그러나 결국 문을 열었다. 상담 선생님 앞에서 한참을 돌려 말하다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외롭습니다.” 그 말은 짧았지만, 나오기까지 세 달이 걸렸다. 퇴근 후 이유 없이 눈물이 난 날이 열 번은 넘었고,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더 고립감을 느낀 밤도 셀 수 없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외로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연결이 끊긴 상태라는 것을.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닿지 않는 상태. 웃고 있으면서도 속이 비어 있는 상태. 상담 선생님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어떤 집에는 불을 켜줄 사람이 없고, 어떤 집에는 불을 켤 힘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이유는 달라도 어둠은 비슷하다고. 그 말은 위로라기보다 설명처럼 들렸다. 나는 처음으로 나를 이해했다. 나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었다.
며칠 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는 게 힘들다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싱크대에서 물을 잠그는 소리 뒤에 조용히 말했다. “마음은 잘 마르지 않는단다.” 그 말은 철학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어머니는 평생 빨래를 널고 걷으며 살았다. 장마철이면 겉은 말라도 속이 젖어 다시 널어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겉이 말랐다고 다 마른 게 아니야. 속이 마르려면 바람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해.”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나는 겉만 정리하고 있었다. 일은 했고, 웃었고, 약속도 나갔다. 그러나 안쪽은 한 번도 햇볕에 내놓지 않았다. 외롭다는 말을 삼켰고, 힘들다는 사실을 숨겼다. 마음 치유는 결심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과 드러냄, 그리고 기다림이 필요했다.
어느 새벽, 나는 성당에 앉아 있었다. “사는 게 무의미합니다.” 기도는 고백이 아니라 항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들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병이 낫기를 빌던 밤, 아이의 열이 내리기를 바라던 시간,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던 기도.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어딘가에 남아 조용히 무게가 되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병상 옆에서 기도하고, 누군가는 결과를 기다리며 침묵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응답은 다르지만, 기다림은 닮아 있다.
그날 밤, 나는 비로소 알았다. 상담의 말과 어머니의 경험과 기도의 침묵은 서로 다른 언어였지만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을. 외로움은 가장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상태라는 것.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고립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밤을 견딘다. 어떤 이는 상담을 통해 외로움을 말하고, 어떤 이는 가족의 말에서 버티는 힘을 얻고, 어떤 이는 기도로 침묵을 통과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지나는 밤의 무게는 비슷하다.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밤은 완전히 밝아지지 않아도 덜 무서워진다. 연대는 손을 잡고 있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같은 밤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다. 나는 오늘도 그 골목을 지난다. 불 꺼진 창은 여전히 어둡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저 안에도 누군가 자기 방식으로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창일지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조금씩, 같은 밤을 지나고 있다.
*관련글 보기
너는 그 자리에, 나는 이 계절에 – 감성 시 한 편의 깊은 여운
선비천사의 브런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