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우리는 길을 나선다.
학교로, 일터로, 때로는 마음을 달래기 위한 짧은 산책길로. 익숙한 골목과 늘 보던 신호등, 이름까지 외워 버린 건물 사이를 별생각 없이 지난다.
길은 늘 그 자리에 있고 사람만 바쁘게 오간다.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으며 걷는다.
그런데 어느 봄날, 문을 여는 순간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벚꽃이 길을 점령했다. 잿빛이던 골목 위로 흰 꽃이 소복하게 내려앉았다. 바람이 스치자 꽃잎이 후드득 흩어졌고, 길은 잠시 하늘과 땅의 경계를 잃었다. 봄비와 벚꽃 사이에서 다시 사랑을 생각하는 순간처럼, 계절은 예고 없이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참 이상했다. 어제까지 무심히 지나던 길인데 꽃이 피었다는 이유만으로 동화의 한 장면이 되었다. 길이 바뀐 것일까. 길을 보는 내가 달라진 것일까.
출근을 서두르던 사람들도 걸음을 늦췄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꺼냈고, 누군가는 꽃 아래 서서 오래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무표정하던 사람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번졌다.
꽃은 말을 하지 않았다. 길을 막지도 않았고, 누구에게 웃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 자리에서 피었을 뿐인데 사람들의 굳은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도시는 편리하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돌보지는 못한다. 반듯한 건물과 빠른 도로 사이에서 우리는 자주 메마른다. 그래서 도시 속 작은 자연이 건네는 위로가 필요하다. 나무 한 그루와 꽃 몇 송이가 콘크리트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다.
그날 벚꽃길에서는 언성이 낮아지고 발걸음이 느려졌다. 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길 하나를 더 만들었다. 바삐 지나치던 우리가 잠시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길이었다.
한 송이 꽃이 누군가의 마음을 바꿨다면 그것은 작지만 분명한 기적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거창한 구호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굳은 이마가 느슨해지고, 낯선 사람에게 길을 비켜 주고, 가까운 사람을 한 번 더 생각하는 데서도 시작된다.
마음이 지치고 삶이 무거운 날에는 애써 씩씩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 창문을 열고 가까운 나무 위의 꽃을 바라보면 된다. 꽃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지만, 문제만 보던 눈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준다.
아름다운 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벚꽃은 서둘러 피고 금세 진다. 그래서 우리는 꽃 앞에서 시간을 의식한다. 꽃이 지는 순간 떠오르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은 아름다움이 영원해서가 아니라 짧기 때문에 더 깊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나는 문득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벚꽃이 참 예쁘네. 당신도 꼭 한번 봐.”
대단한 고백은 아니었다. 함께 꽃을 보러 가자는 약속도 아니었다. 다만 내 안에 잠시 피어난 봄을 조금 떼어 보내고 싶었다.
사랑은 때로 긴 설명보다 짧은 문장에 오래 머문다. 내가 본 좋은 것을 당신도 보았으면 하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함께 산다는 말의 가장 소박한 뜻인지도 모른다.
꽃이 길을 만든다. 나무 아래 생긴 흰 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심했던 하루에서 따뜻함으로 가는 길, 혼자 본 풍경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닿는 길이다.
이 벚꽃 감성 에세이를 쓰는 동안에도 꽃잎은 어딘가에서 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열린 마음의 길은 꽃보다 조금 더 오래 남는다.
오늘 당신의 길에는 무엇이 피어 있는가. 혹시 바쁘다는 이유로 꽃이 만든 길을 그냥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계절과 일상에 관한 다른 글은 선비천사의 브런치스토리에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