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살인자

오후 세 시의 볕이 화원 유리창을 비스듬히 통과하고 있었다.
소래산 아래 작은 화원들이 모여 있는 길. 그중 ‘풀빛’이라는 간판이 붙은 비닐하우스로 네가 먼저 들어갔다.
흙냄새가 났다. 잎 끝에 남은 물방울이 햇빛을 튕겼다. 붉은 아네모네와 노란 장미,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저마다 제 색으로 오후를 버티고 있었다.
너는 튤립 앞에 멈춰 섰다.
“이건 얼마예요?”
가격을 들은 네가 잠시 튤립을 내려다보았다.
“꽃은 예쁜데, 참 비싸네.”
나는 웃었다.
그때였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 선명하던 꽃들의 색이 갑자기 흐려 보였다. 꽃이 시든 것도 아니고 햇빛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네가 그 옆에 서 있었을 뿐이다.
나는 한동안 너와 꽃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꽃 살인자구나.”
네가 고개를 돌렸다.
“뭐?”
“꽃 살인자.”
네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사람한테 별소리를 다 하네.”
나는 웃지 않고 꽃들을 가리켰다.
“쟤들 억울하잖아.”
“뭐가?”
“한 계절 내내 뿌리로 물 먹고 햇빛 받아가며 겨우 저만큼 피었는데, 네가 옆에 서니까 아무도 꽃을 안 보잖아.”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네가 피식 웃었다.
“꽃집 사장님 들으면 쫓겨나겠다.”
그러고는 튤립 한 묶음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조금 전 내가 한 말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꽃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다. 봄날의 꽃도 아름답고, 저녁놀도 아름답고, 비 갠 뒤의 하늘도 아름답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나타나면 이상해진다.
많은 것 가운데 하나였던 사람이 갑자기 하나뿐인 사람이 된다. 다른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다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을 불공평하게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것 가운데 하나만 더 오래 바라보고, 하나의 목소리만 더 잘 듣고, 한 사람의 표정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붙인다.
사랑에는 공평함이 없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은 조금 고장 나 있다.
화원을 나왔을 때 네 손에는 튤립 몇 송이가 들려 있었다.
바람이 불자 꽃잎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까 그 말.”
네가 걸으며 말했다.
“무슨 말?”
“꽃 살인자라는 말.”
“왜?”
“다시는 하지 마.”
“싫었어?”
네가 잠시 뜸을 들였다.
“아니. 너무 유치해서.”
그러면서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길가에도 꽃이 피어 있었다. 담장 아래에도 꽃이 있었고, 화분에도 꽃이 있었다. 조금 전 화원에는 장미와 아네모네와 튤립이 가득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뒤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나는 네가 들고 있던 튤립이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붉었는지, 노랬는지, 분홍이었는지.
분명 내 눈으로 보았는데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꽃값을 듣고 살짝 찌푸리던 네 얼굴은 기억났다.
꽃집에서 나오며 튤립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겨 들던 모습도 기억났다.
“너무 유치해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끝내 감추지 못했던 웃음도 기억났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너를 꽃 살인자라고 불렀지만, 꽃을 죽인 것은 네가 아니었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꽃은 여전히 제 색으로 피어 있었고, 햇빛도 공평하게 꽃잎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한쪽만 바라본 것은 나였다.
사랑은 때때로 한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말고는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날 화원에서 꽃을 죽인 범인을 굳이 찾아야 한다면,
아마 너는 아니었을 것이다.
너를 바라보느라 꽃의 색깔마저 잊어버린,
내 눈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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