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딛는 보폭

비가 그친 뒤의 마당은 언제나 길을 잃는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흙은 발이 닿는 족족 신발 밑창에 들러붙었다. 풀뿌리 사이에 고인 흙물은 조금만 방심해도 바짓단을 더럽혔다.
마당으로 들어서던 날, 나는 질척이는 땅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순간, 흙탕물 사이에 나직하게 몸을 누인 검은 돌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무암 디딤돌이었다.
평소에는 마당을 지나는 장식쯤으로 여겼던 돌이었다. 그러나 온 마당이 흙탕물로 뒤덮이고 나니 달랐다. 신발을 더럽히지 않고 마당을 건널 수 있는 자리는 그 투박한 현무암 디딤돌 위뿐이었다.
첫 돌에 발을 올렸다.
차갑고 둔탁한 감촉이 운동화 바닥을 통해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뜨겁게 들끓던 용암이 식으며 남긴 구멍마다 요 며칠 내린 빗물이 조그맣게 고여 반짝였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돌이었다면 빗물에 미끄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처처럼 숭숭 패인 구멍들이 도리어 내 신발 밑창을 단단히 붙잡아 주고 있었다.
흠처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한 사람의 발을 지탱하고 있었다.
다음 돌로 건너가려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돌과 돌 사이에는 젖은 잡초가 비집고 올라온 한 뼘 남짓의 흙길이 있었다. 만약 이 돌들이 포장도로처럼 틈 없이 빼곡하게 깔려 있었다면 나는 평소처럼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돌 사이의 작은 틈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내 발끝을 살폈다.
돌의 간격은 내게 조용히 묻는 듯했다.
왜 그리 급하게 건너가려 하느냐고.
돌을 내 마음대로 옮길 수는 없었다. 다음 돌에 발을 디디려면 내가 보폭을 줄여야 했다. 돌이 놓인 자리에 맞춰 한 발씩 걸음을 내어주는 일.
그렇게 현무암 디딤돌을 하나씩 건너다보니 조금 전까지 서두르던 마음도 함께 느려졌다.
생각해 보면 삶에서도 모든 길을 내 보폭에 맞출 수는 없다.
일이 내가 원하는 때에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내 뜻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다. 계획했던 길이 갑자기 흙탕물로 변해버리는 날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더 큰 보폭으로 단숨에 건너가려 한다. 빨리 지나가면 괜찮아질 것처럼 서두르기도 한다.
그러나 길이 내 보폭에 맞지 않는다면, 때로는 내가 보폭을 줄여야 한다.
멀리 있는 다음다음을 바라보기보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돌 하나를 바라보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길을 걱정하기보다 지금 발을 디딜 자리를 살피는 것.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뒤처지는 일이 아니라, 내 발이 닿을 곳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비에 젖은 현무암 구멍 속 물기가 산바람을 타고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돌은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켰다. 흙탕물을 건너는 나를 위해 가만히 등을 내어주고 있었다.
현무암 디딤돌은 높이 솟아 있지 않았다. 흙탕물 가까이 낮게 몸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위에 발을 올리고 다음 자리로 건너갈 수 있었다.
문득 사람 사이에도 그런 디딤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손을 잡아 끌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말 없이 곁에 머물며 다음 걸음을 내딛게 해주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가 힘겨운 길 앞에서 잠시 발을 디딜 수 있는 자리가 되어주는 것.
높아지지 않아도 누군가를 일으킬 수 있고, 앞서가지 않아도 누군가를 앞으로 가게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디딤돌이 가진 다정함인지도 모른다.
마당 끝에 다다라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현무암 디딤돌은 여전히 흙탕물 사이에 낮게 놓여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다음 발이 닿을 자리만 내어주고 있었다.
앞으로도 질척이는 길 앞에 설 때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서둘러도 길이 열리지 않는 날이 있을 것이다. 다음 돌이 너무 멀어 보이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이 마당에서 배운 보폭을 떠올리고 싶다.
멀리 건너뛰려 하지 않는 것.
내 앞에 놓인 돌 하나만큼씩 보폭을 줄이는 것.
그리고 다음 발이 닿을 자리를 천천히 살피는 것.
삶에서 필요한 것은 언제나 더 큰 보폭이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자신의 보폭을 줄일 줄 아는 마음이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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