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식물과 아파트 조경이 주는 위로|도시 속에서 만난 작은 자연

현관문을 닫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비가 지나간 초여름 저녁이었다. 아파트 복도 끝 창문 사이로 눅눅한 바람이 들어왔고, 1층 출입문이 열리자 젖은 흙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멀리 공원까지 갈 생각도 없었다. 그저 답답한 마음을 조금 식히고 싶어 집 앞 산책길로 내려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아 발걸음이 느려졌다.

화단 가장자리의 맥문동 위로 흰나비 한 마리가 낮게 날고 있었다. 나비는 금계국 꽃잎 위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장미 덤불 사이에서는 벌 한 마리가 둔탁한 날갯소리를 냈고, 느티나무 위에서는 참새 울음이 짧게 이어졌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자연 속에 있는 걸까.
아니면 사람이 정성껏 만들어낸 자연 속에 있는 걸까.’

아파트 정원은 분명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간이다. 어떤 나무를 어디에 심을지, 어느 계절에 어떤 꽃이 피도록 할지 누군가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을 날아다니는 벌과 나비는 진짜였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도 진짜였다.

예전에는 자연을 만나려면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원도의 숲이나 이름난 수목원 같은 곳에 가야만 비로소 자연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요즘의 아파트 조경은 작은 공원에 가깝다.

계절마다 꽃이 바뀌고, 산책길마다 다른 나무들이 심겨 있다. 봄에는 철쭉과 벚꽃이 피고, 여름에는 배롱나무와 수국이 자란다. 가을이면 단풍이 물들고, 겨울에도 잎을 잃지 않는 나무들이 풍경을 지킨다.

도시는 점점 더 커지고 빽빽해졌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더 많은 초록을 원하게 되었다. 카페에는 플랜트 인테리어가 들어서고, 공항과 호텔 로비에는 대형 조경식물이 놓인다. 사람들은 작은 화분 하나를 위해 햇빛 드는 자리를 고민하고, 반려식물을 키우며 하루의 감정을 달랜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끝내 자연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벤치에 앉아 한동안 정원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분수대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한 노인은 천천히 지팡이를 짚으며 산책길을 돌고 있었다. 관리 직원 한 사람이 화단 가장자리의 마른 잎을 조용히 정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문득 마음이 숙연해졌다.

우리는 흔히 자연을 당연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도시의 작은 정원 하나에도 누군가의 노동과 시간이 숨어 있다. 계절마다 꽃을 바꾸고, 나무를 다듬고, 병든 잎을 떼어내는 사람들의 손길이 없다면 이 풍경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조경이라는 일이 단순히 나무를 심는 작업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마음이 지치지 않도록 도시 안에 숨 쉴 공간을 만드는 일.

어쩌면 그것이 조경가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여행했던 일본 도쿄의 외곽 골목도 떠올랐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번화가가 아니라 조용한 주택가였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오래된 집들이 이어졌는데 이상하게도 거리 전체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집집마다 식물이 있었다.

녹슨 우편함 옆에는 로즈메리가 자라고 있었고, 담벼락 아래의 작은 틈에는 이끼와 들꽃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 어떤 집은 자전거 바구니에 허브 화분을 묶어두었고, 어떤 집은 작은 화단에 계절꽃을 정성껏 심어두었다.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박했다.

그런데 그 소박한 초록들이 골목 전체의 공기를 바꾸고 있었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오래전 우리 동네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여름 저녁이면 어머니들은 마당에 물을 뿌렸고, 젖은 흙냄새가 골목을 천천히 식혀주곤 했다. 담벼락 아래에는 봉숭아와 채송화가 피어 있었고, 아이들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개미집을 들여다보았다.

언젠가부터 그런 풍경은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니 자연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와 있었다.

아파트 정원으로, 플랜트 인테리어로, 반려식물로, 도시 조경으로.

먹고사는 일만으로 벅찼던 시절에는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풍경들이다. 삶이 조금 안정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질문 끝에서 다시 자연을 찾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천천히 산책길을 걸었다.

해가 기울자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라벤더가 흔들릴 때마다 은은한 향이 지나갔고, 조금 전까지 꽃 위를 맴돌던 흰나비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멀리 가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정원을 한번 돌아보았다.

저녁 물을 주는 스프링클러 사이로 젖은 흙냄새가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오래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골목이 잠시 내 곁으로 돌아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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