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비가 내리던 어느 저녁이었다.
나는 오래된 아파트 작은 방에서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유리창에는 빗물이 가늘게 흘렀다. 그 물줄기 사이로 벚꽃 잎들이 흩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비와 꽃이 함께 내려오는 풍경이었다.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은 마치 꽃으로 만든 비처럼 보였다.
그날 밤의 마음은 묘하게 회색이었다.
밝지도,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색이었다.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지만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갑자기 비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전등 불빛은 충분히 밝았지만 이상하게도 방 안에는 빛이 부족한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펼쳐 둔 노트와 식어버린 커피가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밖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 가지가 흔들렸다. 그리고 꽃잎들이 한꺼번에 흩어졌다. 하얀 꽃잎들이 천천히 공중을 맴돌다가 비와 함께 떨어졌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살다 보면 좋아하는 것들은 많다. 좋아하는 음악도 있고 좋아하는 거리도 있고 좋아하는 계절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쉽게 확신하기 어렵다.
사랑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무겁다. 그것은 시간을 요구하고 때로는 아픔도 요구한다.
그래서 사람은 조금씩 조심스러워진다.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마음을 주었다가 다칠까 봐.
나 역시 그랬다.
조금씩 거리를 두며 살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자리.
지금 내가 서 있는 창문 앞이 꼭 그런 자리처럼 느껴졌다.
창문 밖에서는 봄이 한창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이 비처럼 떨어졌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꽃은 피기 위해 피지만 결국 떨어지기 위해서도 핀다.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은 어딘가 쓸쓸해 보이지만 사실 그 장면이야말로 봄이 가장 풍요로운 순간일지도 모른다. 꽃이 떨어지는 순간이 있어야 우리는 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또렷하게 느낀다.
나는 창문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잠깐 망설였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온다.
그리고 바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함께 데려온다.
기쁨도 오고 슬픔도 온다.
사랑도 오고 이별도 온다.
그래서 사람은 가끔 창문을 닫아 둔다.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알 것 같았다.
창문을 닫아 두면 아픔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계절도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봄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젖은 흙 냄새와 나무 냄새가 함께 스며들었다. 그리고 작은 꽃잎 하나가 바람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꽃잎은 조용히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집어 들자 꽃잎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손바닥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사랑과 아픔은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문을 통해 함께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쁨이 오는 길로 슬픔도 오고
희망이 오는 길로 상처도 온다.
그러나 바로 그 길로 새로운 삶 역시 들어온다.
나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바람이 방 안을 지나갔다. 꽃잎 몇 장이 더 바닥에 떨어졌다. 방 안의 공기가 천천히 달라지고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아주 작은 감정 하나가 조용히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거창한 희망은 아니었다.
다만 언젠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혹은 어떤 꿈을 다시 붙잡게 되더라도, 그때는 조금 덜 두려운 마음으로 창문을 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창문은 이제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봄바람이 천천히 방 안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꽃비는 여전히 조용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봄을 내려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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