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운동장 끝자락에서 아이들의 웃음이 바람을 타고 출렁인다.

공이 튀고 운동화가 흙바닥을 긁는다. “막아!” “간다!” 짧은 외침들이 햇살보다 먼저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아이들은 삶의 속도를 재지 않는다. 지금 여기를 온몸으로 산다.
나는 그 소란스러운 생명들 곁을 천천히 걷는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하루를 나누던 시절이 떠오르면, 사랑하는 1학년 1반 친구들에게 건넸던 마음도 봄바람처럼 되살아난다. 목적 없는 발걸음은 생각보다 충만하고, 서두르지 않는 시간은 뜻밖에 귀하다.
운동장을 에워싼 나무에는 연둣빛 잎이 돋았다. 그 아래 진분홍 철쭉이 무심한 듯 환하다. 아이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늘에서도 꽃은 누구의 칭찬을 기다리지 않는다. 피어야 할 때 피고, 질 때가 오면 조용히 자리를 비운다.
마치 오래전 우리의 청춘도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들면 아지랑이가 먼 풍경을 흔든다. 꽃향기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마음의 오래된 문을 연다. 봄은 색으로 오고, 소리로 머물며, 냄새로 기억된다. 그래서 계절은 달력보다 마음에서 먼저 지나간다.
운동장 너머 교실에서는 고3 아이들이 고개를 숙인 채 문제를 푼다. 창밖의 봄은 저토록 환한데, 그들은 미래를 위해 오늘의 봄을 견딘다. 교사가 한 아이를 오래 기억하는 방식은 거창하지 않다. 때로는 콩란을 보며 떠올린 짧은 담임의 기억처럼 작고 푸른 흔적 하나면 충분하다.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한 뒤에야 교실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살의 값을 알게 될 것이다. 시험과 걱정으로 빽빽했던 날들 사이에도 봄은 와 있었다는 것을, 떠나고 나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한때는 이 운동장을 달렸고, 종소리가 나면 서둘러 교실로 돌아갔다. 그때는 시간이 끝없이 남은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늘 지나간 뒤에야 한 계절의 이름을 정확히 알려 준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학창 시절 한 조각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친구의 얼굴, 분필 냄새, 창가의 햇살, 이름조차 잊은 선생님의 한마디. 기억은 큰 사건보다 하찮아 보였던 순간을 오래 품는다.
퇴직 후에야 나는 비어 있는 시간이 결코 빈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퇴직 뒤 오래된 분필이 남긴 삶의 여백처럼, 떠난 자리에는 사라진 것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이 있다.
나는 다시 철쭉 그늘을 지난다. 아이들의 웃음과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 하나까지 마음속에 눌러 담는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오늘은 슬프고,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오늘은 눈부시다.
꽃이 져서 봄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때, 봄은 비로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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