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앞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다.
테이프는 삐뚤게 붙어 있고, 글씨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손에 쥐자 묘한 무게가 느껴진다.
무겁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아직 열어보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다.
이 안에 든 것이 단순한 물건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종종 상자의 여정을 떠올린다.
새벽의 물류창고, 덜컹이는 트럭, 수십 개의 손길.
그 길을 건너 도착한 건 겨우 책 한 권, 티셔츠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준비하던 순간의 마음은 길보다 더 멀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물건보다 먼저 도착하는 건, ‘네가 떠올랐다’는 기억이다.
어머니의 소포는 늘 소박했다.
낡은 박스 안에 마른 나물, 흙 묻은 사과, 비닐봉지에 담긴 고추장.
상자를 열면 방 안 공기가 달라졌다.
편지를 잘 쓰지 않던 분이 대신 보낸 긴 문장이었다.
봉투 대신 고추장, 문장 대신 곰삭은 나물.
그 모든 것이 “잘 지내라”는 오래된 언어였다.
그러나 나는 한때 그것을 번거로워했다.
굳이 사지 않아도 될 것들을 보내며 택배비를 쓰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다.
꺼내자마자 냉장고를 채워야 하는 일은 귀찮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물건이 아니라, 말 대신 보내던 마음이었다는 걸.
박스 안에서 말하지 못한 문장들이 발효되고 있었다는 걸.
소포는 묘하게 보낸 이를 닮는다.
겹겹이 포장지를 둘러 정성을 드러내는 사람,
삐뚤빼뚤한 글씨로 주소만 적는 사람,
짧은 쪽지를 끼워 넣는 사람.
상자를 여는 순간, 나는 물건보다 먼저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어느 철학자는 ‘선물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선물이 선물로 인식되는 순간 이미 계산이 개입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나는 소포 앞에서 자주 반문한다.
정말 그럴까.
택배비의 액수를 넘어서는 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
정성은 계산을 초월하고, 마음은 거래되지 않는다.
가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긴 소포를 떠올린다.
불현듯 스치는 목소리, 오래된 사진,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
발신지는 알 수 없으나, 수신인은 언제나 ‘나’다.
배송 조회조차 할 수 없는 소포.
그러나 분명히 도착한다.
인생 또한 하나의 소포와 닮았다.
우리는 태어날 때 몸과 이름이라는 포장을 받는다.
살아가며 그 안을 채운다.
기쁨, 상처, 희망, 좌절이 차곡차곡 쌓인다.
언젠가 이 삶은 다른 이의 손에 건네질 것이다.
아이에게, 친구에게, 혹은 기억이라는 낯선 창고에.
그리고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안에 담긴 것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었다는 것을.
오늘도 현관 앞 작은 상자가 나를 기다린다.
나는 잠시 멈춰, 그것을 준비하던 사람을 떠올린다.
어떤 장면에서 나를 생각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테이프를 붙였을까.
상자를 열기도 전에, 이미 그 마음은 내 안에 와 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언젠가 나 또한 누군가에게 소포가 될 수 있기를.
그것이 책일지, 짧은 쪽지일지, 혹은 작은 기억일지,
아니면 그것이 나의 글 한 편일지도.
언젠가 누군가가 그것을 열며 웃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관련글 보기
“당신도 누군가의 마지막 얼굴이 될 수 있다면”
탄생이 환호와 축복으로 맞이되듯,늙음과 죽음 또한 축복이 되기를. 삶의 어느 지점에서 이 문장을 되뇌이며 나는 생각에 잠긴다. 오늘 9순을 맞으신 장모님을 뵈러 요양원에 다녀왔다.고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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