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의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를 본다.
햇빛을 잔뜩 머금어 눈부신 초록빛을 내뿜다가도,
갑작스레 몰아친 바람 앞에서 금세 뒤틀리고 흔들린다.
그 떨림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다.
오래도록 뿌리에서 밀려온 기운,
계절마다 품어온 햇살,
그리고 다가올 이별의 그림자까지 함께 흔들린다.
여름날, 잎은 쉼 없이 자신을 태운다.
햇살을 삼키고, 빗방울을 받아내어 맑은 물줄기로 돌려보낸다.
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소리 없는 합창을 이어간다.
숲이 숨 쉬는 듯한 그 합창은
사실 하나하나의 잎이 내어놓은 호흡이다.
스스로를 빛내기보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흔들리는 삶.
가을이 기울면, 잎은 제 몫을 다한 듯 서서히 힘을 뺀다.
바람의 손길에 매달렸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난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낙엽이겠지만,
그 순간은 귀향의 춤이다.
햇살과 바람을 오래 움켜쥔 손을 풀고,
땅으로 되돌아가는 길.
그 떨어짐은 허무가 아니라 귀환이며,
나무가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방식이다.
나는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가을 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
담장 너머로 흩날리던 은행잎들이
바람에 떠밀려 골목길을 메웠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바닥 위에 주워온 노란 잎 하나를
어머니께 내밀었다.
어머니는 웃으며
그 잎을 책 사이에 끼워두셨다.
다음 해 봄, 책장을 넘기다 눌려 있던 그 잎을 발견했을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떨어진 잎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남는다는 것을.
지금도 낙엽을 밟을 때마다,
발끝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오래된 편지처럼 듣는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
사라졌으나 남은 숨결의 기록.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나무는 이미 홀가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잎들을 떠나보내며 앙상해졌지만,
뿌리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생명을 기르고 있다.
나는 묻는다.
지금의 나는 어느 계절에 서 있는가.
햇살을 받아내는 여름의 잎일까.
아니면 바람에 몸을 맡긴 가을의 잎일까.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건 있다.
잎이 흔들리든 떨어지든 제 몫을 다하듯,
나 또한 지금 이 순간
나름의 자리를 지키며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잎은 마지막까지 의미를 남긴다.
땅 위에 쌓여 바스러지고 썩어가는 동안,
이듬해 새로운 싹을 키우는 양분이 된다.
무너짐이 다른 시작을 돕는다는 것.
나는 그것을
어린 날 책 사이에서 발견한
노란 잎에서 이미 배운 셈이다.
그래서 낙엽을 밟는 순간,
나는 늘 잠시 멈춰 선다.
그 바스락거림 속에서,
끝과 시작이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맞닿는 장면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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