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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수필

좌식문화는 사라지고 있을까? 입식문화로 바뀌는 우리의 일상

by 선비천사 2025. 9. 4.

 

 

 

요즘 좌식 음식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한때는 방바닥에 둘러앉는 게 당연했는데, 이제는 대부분 의자에 앉는 입식 식당이다.

 

무릎이 불편한 노인을 배려한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은 생활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앉는 법이 달라지면 삶도 달라진다.
그래서 좌식과 입식을 이야기하는 건 단순히 의자와 밥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사람은 앉는 법을 닮는다.

몸을 낮추면 서로 가까워지고, 허리를 세우면 각자 자리를 지킨다.
좌식과 입식은 생활 방식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대하는 두 풍경이다.

 

나는 어릴 적 시골 외갓집에 가면 먼저 방바닥에 드러눕곤 했다.

구들장이 데워주는 온기가 등줄기를 타고 오르면 마음까지 느슨해졌다.

 

저녁 무렵이면 어른들이 둥글게 모여 밥상을 폈다.

반찬은 누구의 것이 따로 없었다.
젓가락이 오가며 ‘우리’라는 이름으로 한 상이 채워졌다.

 

때로는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윗사람이 “야, 일단 앉아봐라” 한마디 하면 신기하게도 싸움은 금세 누그러졌다.
바닥에 엉덩이가 닿는 순간, 흥분도 뿌리를 내린 듯 가라앉았다.
좌식문화는 그렇게 앉음 속에 화해를 품었다.

 

서양은 달랐다.

풀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의 삶은 늘 말 위에 몸을 싣게 했다.
그래서 땅보다는 높이가 자연스러웠다.

침대 위에 눕고, 의자에 앉아 음식을 먹고, 벽난로 앞에서 대화를 나눴다.

 

술집에서도 서서 잔을 부딪쳤다.
다툼이 생기면 바닥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기보다 그대로 일어서 총을 들었다.
그들의 문화는 땅에 닿기보다 허리를 펴는 데 익숙했다.

 

좌식문화는 함께 둘러앉아 밥을 나누는 공동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식탁과 의자에 앉게 되면서 ‘한 상’의 풍경은 줄어들고, 각자의 접시가 분명해졌다.
앉음의 방식이 바뀌자 생활은 효율적이고 편리해졌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밀착감은 약해지고 개인주의가 한층 짙어졌다.

 

물론 이렇게 단순히 나눌 수는 없다.
바닥에 앉아도 마음이 멀 때가 있고, 의자에 앉아도 가까울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을 매일 실감한다.
아침에는 식탁에 앉아 혼자 커피를 마시고, 저녁에는 방바닥에 둘러앉아 가족과 고기를 굽는다.

하루 안에서도 좌식과 입식은 겹치고, 우리는 그 사이를 오가며 산다.

 

좌식은 우리를 낮추어 서로를 모이게 하고, 입식은 허리를 펴 각자의 거리를 지켜준다.
하나는 온기의 풍경이고, 다른 하나는 효율의 풍경이다.
둘 다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싸움이 붙은 두 무리가 있다.
한국 사람들은 “앉아라”는 말에 숨을 고른다.

서양의 카우보이는 멈추지 못하고 권총을 든다.
같은 분노라도, 몸의 습관이 다른 해답을 만든다.

 

결국 중요한 건 바닥이냐 의자냐가 아니다.
어디에 앉든, 그 자리가 누구와 함께하는 자리인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앉음과 일어섬을 오가며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머무는가가 남는다.

 

아마 인간의 길이란, 높이와 낮음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그 속에서 나눌 온기를 잃지 않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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