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창문을 스치는 바람에 눈이 살며시 떠진다.
평일보다 두 시간은 늦게 일어났건만,
몸 어딘가에는 여전히 잔잔한 피로가 남아 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몽롱한 시간.
다행히 오늘은 아무런 약속도 없다.
달력 위에 ‘공백’처럼 남은 하루.
오늘만은,
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이탈하고 싶다.
주방에서 커피를 내린다.
김이 피어오르고, 구수한 향이
고요한 거실에 천천히 번진다.
아무도 없는 이 공간.
누구에게도 말 걸지 않아도 되는 이 시간이 좋다.
학교에선 늘 누군가의 질문을 듣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다.
강의실 안의 침묵조차도
누군가의 책임이 되어야 하는 공간.
나를 숨기기 어려운 곳.
하지만 지금은,
숨겨도 괜찮다.
아니,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창밖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날아든다.
고개를 기울이니,
공원에서 아버지와 아이가 함께 공을 차고 있다.
웃음이 멀리서 퍼진다.
문득 마음 한켠이 따뜻해진다.
나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아버지 손을 붙잡고 시장 골목을 걷고,
엄마는 부지런히 집안을 정리했다.
라면을 끓이고,
TV 앞에 둘러앉아 한 주를 마무리하던 시간.
그땐 몰랐다.
그게 얼마나 특별한 하루였는지.
지금은 안다.
아무 일도 없던 그 하루들이,
가장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걸.
그 시절은 왜 그렇게 따뜻했을까.
무엇이 그렇게 그리운 걸까.
어쩌면,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나날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고,
아무 말 없이도 사랑받을 수 있었던 시간.
지금은 아니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부모님은 내 곁에 없다.
마지막으로 엄마 손을 잡았던 날은 병실이었다.
아버지를 등 뒤에 두고 걷던 그날의 복도는
유난히 길고 조용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모든 게 회복될 줄 알았다.
우리는 언제나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 이후로 나는 바쁘게 살았다.
강의안을 만들고,
점수를 매기고,
얼굴을 읽고,
침묵을 해석하며.
사람은 무뎌지면서 어른이 되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안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때로는 무뎌진 게 아니라,
감정을 넣을 곳이 없어진 것일 뿐이라는 걸.
해가 천천히 기울고 있다.
커튼 틈으로 스며든 오후의 빛이
벽에 그림자를 길게 남긴다.
오늘도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저문다.
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것이,
어쩌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누구의 얼굴도 읽지 않아도 되고,
누구에게도 답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나를 다시 바라본다.
문득.
내일이 다시 시작된다는 생각이 스친다.
다시 설명해야 하는 하루,
다시 무표정을 연습해야 하는 시간들.
그 생각 끝에,
조용히 숨을 들이쉰다.
괜찮다.
오늘은 느리게 살아도 괜찮았으니까.
조용한 일요일,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조금씩 회복하고,
다시 나를 잃을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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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여행을 떠나겠어요 – 마음을 비우는 계절의 길 위에서
여름은 불덩어리 같았다.햇살은 매정했고, 땀은 등줄기를 따라 끝없이 흘렀다. 그 무거운 열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열망이든, 청춘이든, 혹은 사라져가는 시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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