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의 천국이야, 미국은.”
여동생의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2024년 늦봄, 나는 그 천국의 문을 잠시 열어보게 되었다.
7일 일정으로 LA에서 출발해 멕시코를 오가는 크루즈 여행.
생애 첫 배 위의 휴가였다.
처음 이민 간 여동생의 집에 머물며 나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해변의 산책로, 미술관, 유기농 마트—
어디를 가도 백발의 사람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한국이라면 은퇴는 곧 '손주의 육아와 병원의 대기표'를 의미하지만,
여긴 달랐다.
자식은 고등학교까지만 키우고,
그다음 인생은 ‘부모 각자 몫’이라는 그들만의 규칙.
자립한 아이들은 자기 삶을 살고,
부모는 노년에 접어들며 진짜 인생을 시작한다고 했다.
"한 번 해보는 거야, 오빠도."
여동생의 추천으로 크루즈에 오르던 날,
나는 기대보다는 막연함을 안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주일?
내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배가 출항하자,
세상은 정말 느려지기 시작했다.
망망대해는 시간이라는 개념조차 지워버리는 듯했다.
뷔페, 풀장, 공연, 와인 테이스팅.
모든 게 무료였고,
모든 것이 풍요로웠다.
하루 이틀은 정말 꿈을 꾸는 듯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자
마음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공연장에서 터지는 웃음소리 속에서
나는 점점 혼자라는 기분에 빠졌다.
“나는 지금 진짜 쉬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방향 없이 떠도는 건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할 필요가 없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
자유는 때때로 방황과 무기력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는 걸,
나는 그 바다 한가운데서 처음 배웠다.
어느 날 밤,
갑판 끝자락에 혼자 서서 별을 올려다보았다.
물결은 검고 깊었다.
문득, 한국에서의 나날이 떠올랐다.
정해진 시간표 속,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던 일상.
그 삶이 피곤하면서도 편했던 이유는,
거기엔 내가 아니라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노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법을 안다.
그들의 웃음은 타인을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지금 괜찮다’는 말 없는 선언처럼 보였다.
반면 나는,
‘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멕시코 항구에 들렀다.
작은 시장에서 만난 노부부가 말했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거야.”
그들의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
나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매주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그 시간 동안 나는 계획도, 핸드폰도 내려놓는다.
바다는 이제 없지만,
내 안에 조용히 출렁이는 파도는 남아 있다.
일주일의 여행은 끝났지만,
그 안에서 시작된 질문은 아직도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앞으로의 내 삶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관련글 보기
'감성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핸들을 놓고 문장을 잡았다 – 자율주행의 시대 (11) | 2025.07.04 |
---|---|
가시밭길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4) | 2025.07.03 |
1960년대생 교사가 본 AI 시대 – 죽음보다 삶이 궁금한 오늘 (14) | 2025.07.01 |
“찔레순, 싱아, 칡… 그 시절 산과 들이 주던 건강 간식” (8) | 2025.06.30 |
“외유내강, 나는 왜 항상 미안하다고 말할까” (4) | 2025.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