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룡체, 비 온 뒤 지렁이가 길 위에 쓴 한 줄의 시

토룡체

 

비가 온 뒤
길 위에 문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누가 썼는지 모르는
붉고 가느다란 필체.

땅속에서 오래 생각한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씨였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몸으로
온몸을 문질러
세상을 읽었다.

펜도 없이
종이도 없이
제 몸 하나로
흙의 문장을 고쳐 썼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굳은 흙에 숨이 들고
묻힌 잎은 천천히
다음 생의 밥이 되었다.

비가 그친 아침,
토룡은 이름도 남기지 않고
다시 땅속으로 사라졌다.

길 위에는
구불구불한 한 획.

나는 오래 바라보다
그 글씨를
토룡체라 부르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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