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 선 사람, 인공지능 시대 과도기를 살아온 64세의 기록

나는 올해 예순넷이다.
아직 일을 그만둘 나이는 아니라고들 말하지만, 몸은 이미 몇 가지 신호를 보내고 있다. 계단을 오르다 숨을 고르고, 휴대전화 화면의 글씨를 키운다. 나는 여전히 여기에 서 있는데, 세상은 어느새 다음 장으로 넘어가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태어난 마을에는 포장도로가 없었다.
비가 오면 길은 금세 질척해졌고, 신발 바닥에는 흙이 눌어붙었다. 겨울 새벽이면 어머니는 연탄을 갈아 끼웠다. 불꽃이 잠깐 살아났다 사라질 때마다 방 안에는 매캐한 냄새가 돌았다. 나는 그 냄새 속에서 책을 읽었다. 공부는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기보다, 지금을 견디기 위한 방식에 가까웠다.

시간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흘렀다.
흑백 텔레비전이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화면 속 사람들은 현실과는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직장에 들어가 처음 컴퓨터를 배웠을 때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이 낯설었다. 그 기계가 언젠가 나보다 정확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애써 외면하면서도, 나는 끝내 배우는 쪽을 택했다. 뒤처지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은 또 다른 경계에 서 있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시대를 말한다. 기계가 판단하고, 인간은 더 오래 산다고 한다. 질병을 예측하고 노화를 늦추는 기술도 머지않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시간을 계산한다.

십 년 후면 나는 일흔 넷이다.
숫자 하나가 바뀌는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 숫자 앞에서는 선택지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 새로운 세상이 열릴 때, 나는 그 안에서 무엇이 될까. 사용자가 될지, 관찰자가 될지, 아니면 이름 없이 기록되는 통계의 일부가 될지 알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서운하다.
가난했던 시간을 통과하며 몸으로 견뎠고, 풍요로워진 시대에는 뒤처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이제 막 다음 세상이 열린다고 말하는 순간, 내 시간은 이미 끝을 향해 접히고 있다. 이것은 분노라기보다, 늦게 도착한 사람이 느끼는 조용한 박탈감에 가깝다.

과도기라는 말은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는 이전 시대의 불편함을 대부분 감당했고, 다음 시대의 편리함은 끝까지 누리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 대화가 오래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설렘과 불안이 한 자리에 앉아 있다.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미래를 바꿀 힘은 없지만, 지나온 시간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연탄 냄새가 배어 있던 새벽, 이메일 답장을 기다리며 화면을 새로고침하던 밤, 처음 기계가 나보다 빠르게 대답했을 때 느꼈던 묘한 패배감까지. 이것들은 한 개인이 한 시대를 통과하며 남긴 흔적이다.

이 글은 예언도 분석도 아니다.
다만 문 앞에 잠시 멈춰 서 있었던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미래를 부러워했고, 동시에 그 미래가 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문은 곧 열릴 것이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 앞에 서서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기척을 느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생이 완전히 비켜간 것은 아니라고, 나는 조용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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