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머물다

해거름에 집 근처 산자락을 걷는다.
요즘은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의 감촉이 전과 다르게 느껴진다. 바람이 달라진 것인지, 내가 달라진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예전처럼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서 어디론가 서둘러야 할 것 같지는 않다.
한때 바람은 늘 나를 재촉했다.
등 뒤에서 거세게 밀어붙이거나 정면에서 눈발을 몰고 왔다. 어디론가 바삐 가야 할 것 같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계속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멈추면 뒤처지는 줄 알았다.
돌아보면 지난 삶은 짐을 지고 긴 언덕을 오르는 일이었다.
어깨를 누르던 것은 거창한 야망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마주해야 했던 타인의 기대와 내가 마땅히 해내야 한다고 믿었던 일상의 소임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하얀 분필 가루가 묻어나던 시간들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울타리가 되어야 했고, 맡은 자리에서는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 제 몫의 삶을 다하기 위해 하루를 견디고 또 다음 날을 준비했다.
그렇게 수많은 날짜를 건너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견딘 것도 있었다.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내려놓지 못한 것도 있었다. 사명처럼 빛나던 말들이 어떤 날에는 묵직한 돌덩이가 되어 어깨에 얹혔다.
그래도 걸었다.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했다.
산등성에 다다르면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주었다. 때로는 짙은 그늘이 드리운 모퉁이에 멈춰 홀로 가쁜 숨을 고르기도 했다.
삶도 그랬다.
기쁜 순간이 있었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언덕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언덕이 기다리고 있었다. 짐 하나를 내려놓으면 어느새 다른 무게가 손에 쥐어졌다.
그때는 그것이 힘들기만 했다.
나를 짓누르는 무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삶의 무게는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때로는 거센 바람 속에서 사람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내가 책임져야 했던 사람들, 끝까지 해내야 했던 일들, 쉽게 저버릴 수 없었던 약속들이 나를 힘들게 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무게가 있었기에 거센 바람에도 내 걸음이 쉽게 흩어지지 않았는지 모른다.
타인을 향했던 묵묵한 책임감 또한 오늘의 나까지 이어진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한 힘이었다.
그러니 지나온 날들을 힘겨움이라는 한마디로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그 안에는 사랑도 있었고 책임도 있었다. 견딤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 시간을 살아낸 내가 있었다.
이제는 무거운 가방 속 짐을 하나둘 덜어내도 될 것 같다.
오랫동안 바깥으로만 향했던 걸음도 천천히 거두어들이고 싶다.
해가 기울면 산자락의 나무들은 제 그림자를 길게 늘인다. 소란스럽던 세상의 소리도 조금씩 멀어진다.
나는 노을 속에 잠시 멈춰 손을 바라본다.
마디가 굵어지고 피부가 투박해진 손.
늘 무언가를 쥐어야 했던 손이다. 누군가를 위해 움직였고, 무엇인가를 지켜내기 위해 힘을 주었던 손이다.
그 손을 오래 바라보다 문득 생각한다.
이제는 아무것도 쥐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손을 주머니 깊숙이 넣는다.
빈손으로 천천히 걷는다.
그러자 그제야 내 숨소리가 들린다.
무언가를 해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 누군가의 기대에 답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에게 머무는 시간.
이런 시간이 내게도 필요했다.
나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면서 나 자신에게는 유난히 엄격했다.
남의 실수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말하면서 내 실수는 오래 마음에 담아두었다.
누군가 지쳤다고 하면 쉬어도 된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에게는 조금만 더 견디라고 했다.
누군가의 아픔은 오래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덮어두었다.
이제는 그 시선을 거두어들이려 한다.
상처 입고 지친 내 마음의 결을 천천히 쓸어본다.
그리고 나에게 한마디를 건넨다.
수고했다고.
참 오래 애썼다고.
자기 위로란 대단한 말로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지나온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그 시간을 살아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에 더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중요한 소임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앞으로 가는 것이 중요했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았고, 손에서 무엇인가를 놓으면 삶까지 놓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삶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질문이 달라진다.
얼마나 멀리 왔는가보다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나는 나 자신과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중년의 삶은 단순히 속도가 느려지는 시간이 아니다.
바깥으로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리고, 지나온 자신의 삶을 다시 읽는 시간이다.
그동안 무엇을 얻었는지만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오래 짊어지고 왔는지도 돌아보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제 내려놓아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시간이다.
오래 책임을 다했다면 조금 쉬어도 된다.
오래 타인을 돌보았다면 이제 나를 돌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것은 이기적인 일이 아니다.
나에게 돌아오는 일이다.
바람은 여전히 분다.
세상도 여전히 바쁘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난다. 곳곳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러나 모든 바람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모든 부름에 대답할 필요도 없다.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멈추는 것도 삶이고, 내려놓는 것도 삶이다. 오래 바깥을 향해 걸어온 사람이 자기 안으로 돌아오는 것 또한 삶의 한 여정이다.
나에게 머문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아니다.
지나온 자신을 인정하고, 남은 삶을 자신의 속도로 살아가기 위해 잠시 돌아오는 일이다.
나는 내 안의 조용한 공간으로 돌아와 가만히 문을 닫는다.
오늘만큼은 누구를 위한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한 나로 있고 싶다.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따지지 않는다. 이루지 못한 것과 놓쳐버린 것을 헤아리지도 않는다.
그저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 하나를 바라본다.
오래 견디고, 오래 사랑하고, 오래 책임지며 살아온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였음을 이제야 가만히 받아들인다.
바람이 다시 옷깃을 스친다.
나는 더 이상 서두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묻지 않는다.
오늘은 오래,
나에게 머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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