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추석 성묘길, 아무도 줍지 않는 밤

 

추석 당일, 온 친척이 모여 강화도로 성묘를 갔다.

차창 밖으로 가을 들판이 흘러갔다. 벼는 햇빛을 받아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들판은 환했지만 마을은 조용했다.

어릴 적에는 골목마다 사람 소리가 있었다. 대문이 열리고 닫혔고,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이제는 오래된 집들 사이로 빈집이 드문드문 보였다.

강화도의 가을은 그대로인데, 그 가을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이 줄어 있었다.

차에서 내려 조상의 묘소가 있는 야산으로 들어섰다.

예전에는 산길이 선명했다. 사람들이 오가며 밟은 흙길이 묘소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잡목과 덩굴이 길을 덮고 있었다.

마른 가지가 옷을 붙잡았다. 도깨비바늘은 바짓단에 달라붙었다.

사람이 걷지 않은 길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지고 있었다.

가파른 비탈을 오르다가 발끝에 무언가가 툭 걸렸다.

밤이었다.

낙엽 사이에 밤알이 수북했다.

벌어진 밤송이에서 빠져나온 밤은 붉고 윤기가 났다. 한 알을 집어 들면 손바닥이 묵직할 만큼 굵었다.

한두 알이 아니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밤이 채였다.

앞서 가던 어른이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밤이 참 많네.”

그뿐이었다.

아무도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이렇게 좋은 밤이 지천에 떨어져 있는데 아무도 줍지 않았다.

그 순간 오래전 강화도의 가을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가을이 오면 동네 아이들은 깡통이나 자루를 하나씩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어느 밤나무에 알이 굵은지, 어느 비탈에 밤이 많이 떨어지는지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먼저 온 아이가 좋은 나무를 차지했다.

늦게 온 아이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 했다.

긴 나뭇가지로 밤송이를 건드렸다. 툭 하고 떨어지면 운동화로 밟아 가시 사이를 벌렸다.

그 틈에서 반질반질한 밤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른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손가락을 가시에 찔리기도 했다. 손톱 밑에는 흙이 까맣게 끼었다.

그래도 아픈 줄 몰랐다.

해가 기울어 집으로 돌아갈 무렵이면 주머니가 불룩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밤알끼리 부딪쳤다.

달그락, 달그락.

주머니가 무거울수록 마음은 이상하게 든든했다.

집에 도착하면 마루 끝에 앉아 생밤부터 까먹었다.

단단한 겉껍질을 벗기고 나면 떫은 속껍질이 남았다. 칼을 가져오기도 귀찮아 이빨로 율피를 조금씩 갉아냈다.

입안이 금세 떫어졌다.

입술에도 검은 물이 들었다. 서로 까매진 입을 보고 낄낄거렸다.

그렇게 벗겨낸 생밤은 달고 고소했다.

그때는 산에서 얻는 것들이 귀했다.

밤 한 줌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감이며 도토리며 산에서 나는 것은 누군가의 손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산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길도 있었다.

나는 다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시절에는 서로 먼저 줍겠다고 뛰어다니던 밤이었다.

지금은 잘 익은 밤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는데도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밤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삶이 변했다.

마을에는 아이들이 드물어졌다. 산을 오가는 사람도 줄었다. 명절에 고향을 찾은 자식들은 성묘를 마치면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무엇보다 이제는 먹을 것이 귀하지 않다.

마트에 가면 손질된 밤도 쉽게 살 수 있다. 굳이 가파른 산을 올라 가시에 찔리며 밤을 주울 이유가 없다.

풍요로워진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대신 어떤 것 앞에서는 더 이상 허리를 숙이지 않게 했다.

그날 강화도 산속에 떨어진 밤도 그중 하나였다.

사람이 떠난 농촌의 변화는 거창한 모습으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걷던 사람이 없어 산길이 희미해지는 일.

잘 익은 열매가 떨어져도 거두는 손이 없는 일.

명절이 지나면 마을이 다시 조용해지는 일.

그런 작은 풍경들이 쌓여 한 마을의 시간이 된다.

성묘를 마치고 산을 내려왔다.

올라올 때 보았던 밤들이 다시 발끝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쳤다.

몇 걸음쯤 내려갔을 때 뒤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린 시절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내 주머니에서 나던 소리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낙엽 사이로 붉은 밤들이 보였다.

잠시 바라보다 다시 산을 내려왔다.

밤은 줍지 않았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창밖으로 강화도의 들판이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논이 지나갔다. 오래된 집들이 지나갔다. 조금 전 올랐던 산도 멀어졌다.

산속에는 아직 많은 밤이 떨어져 있을 것이다.

오늘 밤 비가 오면 낙엽 아래로 조금 더 파묻힐 것이다. 어떤 밤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운이 좋은 밤은 이듬해 봄 작은 싹을 밀어 올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밤나무의 일이었다.

차가 강화도를 빠져나갈 때 무심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밤으로 가득해 손조차 들어가지 않던 주머니였다.

빈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을 한 번 오므렸다 폈다.

어디선가 오래전의 달그락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손을 빼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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