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남겨 둔 것들을 꺼내는 계절

아침에 현관문을 열자 바람이 먼저 들어왔다.
반소매 차림으로 한 걸음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얇은 겉옷을 꺼내 입었다.
달력보다 몸이 먼저 계절을 알아차렸다.
가을이었다.
아파트 화단의 감나무에는 아직 잎이 무성했다. 그 사이로 작은 감 몇 개가 붉어지고 있었다.
여름 내내 그 길을 오갔는데 열매가 있는 줄 몰랐다.
바쁘다는 말은 편리하다. 보지 못한 것까지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주니까.
오후에 옷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카디건 하나를 꺼냈다.
어머니가 입으시던 옷이었다.
색은 바랬고 소매 끝은 조금 늘어나 있었다. 단추 하나가 다른 것들과 달랐다. 떨어진 자리에 어머니가 집에 있던 비슷한 단추를 달아 놓으셨다.
“이 정도면 됐지, 뭐.”
어머니는 자주 그렇게 말씀하셨다.
새것을 사야 할 때도 조금 고쳐 쓰셨다. 몸이 아픈 날에도 하루 쉬면 된다고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못마땅할 때가 있었다.
왜 자신에게는 늘 ‘이 정도’면 되는지.
그 말을 물어본 적은 없었다.
카디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옷은 가벼웠다.
그런데 쉽게 접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전화가 자주 왔다.
밥은 먹었느냐.
오늘 춥다더라.
운전 조심해라.
나는 대개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지금 바빠요. 이따 전화할게요.”
이따가 전화한 날도 있었다.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다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끊기 직전,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숨소리가 잠깐 들릴 때가 있었다.
그때는 그 몇 초가 길었다.
지금은 너무 짧다.
카디건을 옷장에 넣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두었다.
방을 나갔다 돌아오니 누군가 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부엌으로 가서 물 두 잔을 꺼냈다.
한동안 바라보다 한 잔을 다시 찬장에 넣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다음 날 아내와 동네를 걸었다.
길가에는 은행잎이 떨어져 있었다. 아내는 은행 열매를 밟지 않으려고 이쪽저쪽 피해 걸었다.
“왜 웃어?”
“당신 걸음이 꼭 줄넘기하는 것 같아서.”
아내가 내 팔을 툭 쳤다.
몇 걸음 뒤에는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쪽으로 와. 거기 바닥 젖었어.”
우리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화단의 감은 언제 익을지, 저 집 강아지는 왜 우리만 보면 짖는지.
대단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다가 오래전 현관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내가 돌아갈 때마다 문 앞까지 따라 나오셨다.
“차 조심해.”
나는 대답하고 돌아섰다.
몇 걸음 가다 돌아보면 어머니는 아직 현관에 서 계셨다.
그때는 손만 한번 흔들고 갔다.
저녁에 차를 마시려다 아내에게 물었다.
“차 마실래?”
“조금 있다가.”
나는 물을 올렸다.
찻잔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내 앞에 놓고, 하나는 맞은편에 두었다.
이번에는 넣어 두지 않았다.
며칠 뒤 화단을 지나다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감 하나가 없어졌다.
누가 따 갔는지, 익어서 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남은 감을 세어 보았다.
세 개였다.
그날부터 감나무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어제 세 개였으니 오늘도 세 개일 것 같으면서도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저녁 바람이 불었다.
잎 사이에서 붉은 감 세 개가 흔들렸다.
한참 올려다보다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 너머에서 아내가 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감 좀 세느라고.”
아내가 웃었다.
식탁 위에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창밖에서 감나무 잎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
*관련글 보기
사람은 현재의 자신에게만 잔인해|지금을 가장 아프게 대하는 이유에 대하여
창문이 들려주는 마음의 이야기: 감정을 비추는 투명한 거울
선비천사의 브런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