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 장희빈 묘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 | 가장 작은 무덤이 가장 크게 보인 이유

장희빈 묘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질문

퇴직한 친구가 고양시로 이사했다.

그는 사립고등학교에서 평생 음악을 가르쳤다. 성악을 전공했고 교단에 선 세월만도 사십 년 가까이 된다. 입학식과 졸업식, 축제와 합창대회마다 학생들은 그의 지휘를 따라 노래했고, 그는 늘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정년퇴직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바빴다.

교회 합창단을 지휘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젊은 성악도들에게 개인 레슨도 해주고 있었다. 학교라는 무대는 내려왔지만 음악이라는 무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었다.

“퇴직하면 한가할 줄 알았는데 더 바빠.”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고양시 서오릉 입구에서 만나 천천히 숲길로 들어섰다.

서오릉은 여러 왕릉이 모여 있는 조선왕릉이다. 천천히 한 바퀴를 돌면 한 시간 반쯤 걸린다. 20여 년 전에 심었다는 소나무들이 어느새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솔향기가 스쳐 지나갔다.

친구는 음악 이야기를 했다.

합창단에서 새로 맡은 곡 이야기, 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학생들 이야기, 늦은 나이에 성악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은 직업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구나.

교사라는 이름표를 내려놓았지만 그는 여전히 음악가였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웅장한 왕릉들이 나타났다.

살아생전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왕과 왕비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봉분은 크고 단정했고 석물들은 위엄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큰 왕릉보다 작은 묘 앞에 더 오래 머물고 있었다.

산책길 왼편 숲 가장자리에 자리한 대빈묘였다.

장희빈의 묘.

왕릉에 비하면 소박했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웅장하지도 않았다.

왕릉들이 언덕마다 제 주인을 자랑하듯 누워 있는 사이, 그 묘는 숲 끝에서 아직도 벌을 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안내판을 읽고 있었고, 누군가는 한참 동안 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왜 사람들은 가장 큰 왕릉보다 가장 작은 묘에 더 관심을 가질까.

친구도 한동안 대빈묘를 바라보았다.

“신기하지.”

그가 말했다.

“왕 이름은 다 잊어도 장희빈 이름은 기억하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권력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권력이 남긴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래서 역사책은 왕의 이름을 기록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이야기가 있는 인물을 붙들어 둔다.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그 순간 문득 친구와 장희빈이 겹쳐 보였다.

물론 두 사람의 삶은 전혀 다르다.

한 사람은 몰락한 권력의 상징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여전히 음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월이 모든 사람에게서 직함을 거두어 간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왕도 왕이기를 멈춘다.

교사도 교사이기를 멈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야기를 남기고,

누군가는 새로운 무대를 만든다.

친구는 지금도 학생들을 만나고 노래를 가르친다.

교회 합창단 앞에서 지휘봉을 들고, 강의실에서 음악을 이야기하고, 레슨실에서 젊은 성악가의 발성을 교정한다.

그의 인생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어쩌면 사람의 가치는 높은 자리에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 자리를 내려온 뒤에도 무엇을 하며 살아가느냐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시 출구를 향해 걸었다.

친구는 다음 주 합창 공연 이야기를 했고 나는 웃으며 들었다.

숲길 끝에 다다랐을 때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소나무 숲 가장자리에 작은 묘 하나가 보였다.

조선은 그 묘를 역사의 구석에 두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도 그곳을 찾는다.

삶은 권력보다 길고,

이야기는 권력보다 오래 남기 때문이다.

그날 서오릉에서 가장 크게 보인 것은 가장 작은 무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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