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다 보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날이 있다.
신기하게도 시작은 늘 사소하다.
며칠 전, 오랫동안 준비하던 일에서 작은 문제가 생겼다. 다시 확인하면 될 일이었고, 며칠 지나면 잊힐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모니터를 바라본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마지막 빗방울이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실망과 좌절이 있었다. 애써도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시간, 기대만큼 따라오지 않는 결과, 잘될 것이라고 믿으며 견뎌 왔지만 현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날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니, 괜찮은 척하고 있었다.
책상 위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창밖에서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같은 화면만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지쳐 있었을까.’
사람은 큰 실패 때문에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하지 못한 실망들이 오래 쌓일 때 무너진다.
버리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속 창고를 가득 채우고, 어느 날 작은 충격 하나가 들어오면 더는 버틸 공간이 없어진다.
그날의 나는 딱 그랬다.
더 앉아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갔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걷고 싶었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고, 공원으로 향했다.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분식집에서는 기름 냄새가 흘러나왔고, 벤치에 앉은 노부부는 말없이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서운했다.
나만 멈춰 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걸었지만 기분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답답했고, 여전히 앞날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사람은 확신이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의 삶도 그랬다.
답을 알고 걸어온 적은 거의 없었다.
그저 오늘을 살아냈고, 내일도 살아냈다. 그렇게 하루가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공원 끝에 다다랐을 때 붉은 노을이 나무 사이로 번지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포기하지 못한 채 지쳐 있었을 뿐이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실패는 끝이지만, 지침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시골 아궁이에서 불이 꺼진 줄 알고 재를 뒤적였던 적이 있다. 겉은 새까맣게 식어 있었지만 안쪽에는 작은 불씨가 살아 있었다. 그 불씨 하나가 다시 장작을 태우고 방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날 나는 사람의 마음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의기소침해도 완전히 꺼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혐오에 빠져도, 무기력에 잠겨도,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다시 살아보려는 불씨 하나쯤 남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불씨를 믿는 일이다.
거창한 결심이 아니다.
내일 아침 다시 일어나는 일.
해야 할 일을 한 번 더 해보는 일.
오늘보다 한 걸음 더 걷는 일.
삶은 결국 그런 작은 반복으로 이어진다.
그날 밤 창문을 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다시 일어서야지.”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앞날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했다.
오늘 내가 해낸 것은 문제를 해결한 일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은 그것으로 충분한 날들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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