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 단지 진입로에서 둔탁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멎는다. 잠시 뒤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면 비닐봉지 하나가 놓여 있다. 매듭을 풀자 밀폐된 용기 속 붉은 열기가 훅 끼쳐온다.
요즘 저녁이면 가끔 몸이 먼저 귀찮아진다.
찬장에서 냄비를 꺼내고, 쌀을 씻고, 파를 다듬는 일이 별것 아닌데도 멀게 느껴진다. 그럴 때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몇 번 누르면 저녁 한 끼가 현관 앞까지 온다.
편리한 세상이다.
오랫동안 칠판 앞에 서서 살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자를 쓰고 지웠다. 분필가루가 손등에 내려앉고, 지우개를 털면 하얀 먼지가 날렸다.
그때는 지우면 사라지는 것이 많았다.
수업이 끝나면 칠판의 글씨도 지웠고, 틀린 답도 지웠다. 다음 날이면 깨끗한 칠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퇴직하고 보니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는 것도 많았다.
배달음식 뚜껑을 연다.
붉은 양념이 튀김옷 사이로 번들거린다. 매운맛과 단맛이 번갈아 혀를 자극한다. 첫 몇 젓가락은 제법 행복하다. 피곤했던 하루가 잠시 입안에서 사라진다.
배달음식이 나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늦은 퇴근 뒤의 구원이고, 누군가에게는 밥할 힘조차 없는 날의 따뜻한 한 끼다. 나 역시 그 편리함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다.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습관인지도 모른다.
한 번의 편리함은 휴식이지만, 편리함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생활의 모양이 된다.
허기가 가라앉자 젓가락이 느려진다. 식어가는 음식에서는 처음의 매혹적인 냄새가 사라지고, 입안에는 달고 매운 기운만 남는다.
용기를 들고 개수대로 간다.
따뜻한 물을 틀고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문지른다. 기름기는 금세 사라지는데 붉은 양념 자국은 희미하게 남는다.
한 번 더 문질러본다.
그래도 남는다.
그 붉은 착색을 한동안 바라본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도 이런 착색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처음에는 그저 피곤해서 한 번 미뤘을 뿐이다. 다음에는 귀찮아서 미루고, 그다음에는 익숙해서 하지 않는다. 그렇게 작은 편리함이 반복되면서 생활은 조금씩 다른 색으로 물든다.
습관의 착색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천천히 사람을 바꾼다.
생각해 보면 음식을 만드는 일도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파뿌리를 자르고 흙을 씻는다. 무를 썰다가 두께가 제각각이 되기도 한다. 국이 짜면 물을 더 붓고, 싱거우면 소금을 한 꼬집 더 넣는다.
가끔 냄비를 태운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런 저녁에는 내가 내 하루에 조금 더 깊이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마 위에서 칼이 툭툭 소리를 낸다. 냄비에서는 국물이 보글거린다. 대파 냄새가 집 안을 돌아다닌다.
요리는 허기를 해결하는 가장 느린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는 손이 움직이는 시간이 있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고, 누군가의 밥그릇을 한 번 더 바라보는 시간이 있다.
편리함은 시간을 아껴준다.
하지만 모든 시간을 아끼며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베란다 한구석에 씻은 플라스틱 용기를 포개놓는다. 용기들이 서로 부딪치며 서걱거린다.
한때 칠판의 글씨는 지우개 몇 번이면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런데 살아보니 사람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오래 반복한 말투가 얼굴에 남고, 오래 품은 생각이 눈빛에 남는다. 매일 무엇을 선택하며 살았는가는 결국 삶의 어딘가에 색을 남긴다.
좋은 착색도 있을 것이다.
매일 걷던 길이 몸에 남고, 오래 읽은 문장이 생각에 남고, 누군가를 위해 끓인 국 한 그릇이 마음에 남는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는 일이 아닐 것이다.
무엇에 물들며 살 것인가.
내일 저녁에도 나는 배달앱을 열지 모른다. 사람이 매일 부지런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그전에 찬장을 한 번 열어볼 생각이다.
그 안에는 작고 묵직한 냄비 하나가 있다.
냉장고에는 무 한 토막도 남아 있다.
도마 위에 무를 올리고 칼을 대면 사각, 하고 서늘한 소리가 날 것이다.
아주 작은 소리다.
그러나 어떤 날에는 그런 작은 소리가, 내가 아직 내 삶을 직접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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