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꽃을 찧는 저녁|중년의 무사와 봉숭아를 그린 시

중년의 무사와 봉숭아

 

바람이 지나가자
나무가 젖은 잎을 한 번 턴다.

나무 아래
중년의 무사가 칼을 칼집에 넣는다.

손등의 오래된 상처마다
얇은 딱지가 앉아 있다.

칼자루를 놓은 손이
한동안 무릎 위에 머문다.

멀리서 쇠 부딪는 소리가 난다.

손끝이 잠시 움직인다.

무사는 칼을 뽑지 않는다.

나무 아래에는
빗방울 몇 개가 떨어질 뿐이다.

그때
아들과 딸이 달려온다.

두 아이가 손을 펴자
붉은 봉숭아꽃이 한가득이다.

무사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칼을 뽑는다.

아이들이 숨을 죽인다.

무뎌진 칼날이
봉숭아 꽃잎 위에 내려앉는다.

한 번,
다시 한 번.

붉은 물이 번진다.

칼날을 타고 흐르던 붉은 것이
오늘은 아이들의 손톱에 스민다.

아들은 제 손톱을 들여다보고
딸은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무사는 아무 말 없이
작은 손톱마다 꽃잎을 얹는다.

바람이 다시 분다.

나무 아래
봉숭아 씨주머니 하나가 익어 있다.

아이들이 손을 뻗는다.

무사는 말리지 않는다.

손끝이 닿자
씨주머니가 터진다.

작은 씨앗들이
저마다 다른 곳으로 튀어간다.

무사는 빈 줄기를 바라본다.

칼은 그의 무릎 곁에 놓여 있고

아이들의 손톱에는
붉은 꽃물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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