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퇴직, 도마뱀의 꼬리가 내게 가르쳐 준 제2의 인생

도마뱀의 꼬리

 

봄가을 볕이 바위를 데우는 날이면, 나는 강화도 뒷산의 널찍한 바위 하나를 떠올린다.

산초나무 잎이 그늘을 드리운 그 바위에는 늘 도마뱀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차가운 몸으로 햇살을 마시듯 바위에 몸을 붙이고, 세상 모든 경계를 잠시 내려놓은 듯 고요히 숨을 고르던 작은 생명.

어린 날의 나는 그 평화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살금살금 다가가 손을 뻗는 순간, 손끝에는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에서 꿈틀거리던 것은 몸통이 아니라 끊어진 꼬리뿐이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파르르 떨던 꼬리. 몸통은 이미 풀숲 깊은 곳으로 사라진 뒤였다.

움직임을 멈춰가는 꼬리를 바라보며 배신감과 미안함을 함께 느꼈다.

“꼬리는 다시 자라니까 괜찮아.”

누군가의 그 말에 위안을 얻으며 나는 작은 꼬리를 풀밭에 조심스레 묻어주곤 했다.

세월이 흘러 머리칼에 서리가 내리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 절단은 포기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도마뱀의 꼬리는 몸의 균형을 잡고, 비상시를 위해 지방을 저장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그 소중한 일부를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고 목숨을 지켜내는 선택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붙드는 용기보다 놓는 용기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람도 평생 한 번쯤은 스스로 꼬리를 버려야 하는 계절을 만난다.

내게는 그날이 명예퇴직을 결심하고 교단을 떠나던 날이었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었다.

정년이 나를 밀어낸 것도 아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가 내린 선택이었다.

서른 해 넘게 지켜온 교단.

매달 통장에 들어오던 월급.

그리고 세상이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주던 시간.

그 모든 것은 오랫동안 내 삶의 균형을 잡아주던 든든한 꼬리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꼬리를 끝까지 붙잡고 있어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결국 나는 가장 소중했던 시간을 내 손으로 내려놓았다.

명예퇴직원에 이름을 적던 순간, 잉크보다 먼저 마음이 떨렸다.

교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남아 있는 그곳에는 내가 두고 온 서른 해의 시간이 바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버리고 온 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명함에서 직함이 사라지자 마음도 한동안 갈 곳을 잃었다.

월요일 아침이 되어도 출근할 학교가 없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낯설었다.

시계는 같은 시간을 가리켔지만 하루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무도 내 이름 앞에 ‘선생님’을 붙여 부르지 않는 하루가 그렇게 허전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또 자라니까 괜찮다.”고 쉽게 말했지만, 삶에서 다시 자라난 자리들은 예전처럼 매끄럽지 않았다.

거칠고 둔탁했다.

문득문득 깊은 곳을 저미는 통증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흉터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작은 책상 앞에 앉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교단에서는 아이들의 삶을 읽었다면, 이제는 내 삶을 읽는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기보다 내 호흡으로 문장을 다듬는다.

은퇴는 내 삶의 끝이 아니었다.

명예퇴직은 무언가를 잃는 일이 아니라, 더 오래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이었다.

도마뱀이 꼬리를 버리고 살아남듯, 나 역시 교단을 떠나고서야 비로소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시작했다.

요즘도 소래산 자락을 걷다가 볕이 잘 드는 바위를 만나면 걸음을 멈춘다.

문득 강화도 뒷산에서 만났던 그 도마뱀이 떠오른다.

나 역시 바위 위에 잠시 앉아 햇살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더 채우려 애쓰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따뜻하게 데우는 일.

이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제야 알았다.

잘라낸 자리는 끝이 아니었다.

삶은 잃은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려놓은 자리에서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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