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깨비의 외다리 춤|잃어버린 것들로 다시 균형을 배우는 삶의 문학수필

방아깨비의 외다리 춤

 

햇살이 마당 한쪽을 천천히 비추는 아침이면 문득 어린 시절의 풀밭이 떠오른다. 풀비린내가 가득하던 여름, 온 세상은 초록이었다. 풀무치와 여치, 이름 모를 벌레들이 풀잎 사이를 누비던 그곳에는 언제나 방아깨비가 있었다.

지금도 방아깨비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긴 뒷다리가 생각난다. 길쭉한 몸과 곧게 뻗은 다리. 어린 눈에는 잘 깎아 만든 목각 인형처럼 반듯하고 늠름해 보였다. 수풀 속에 숨어 있어도 그 긴 다리는 금세 눈에 띄었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다가가 방아깨비의 두 뒷다리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잡곤 했다. 그러면 녀석은 위아래로 몸을 굽혔다 펴기를 반복했다.

쿵더쿵.

쿵더쿵.

디딜방아를 찧는 것 같은 그 신기한 몸짓에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었다. 그때의 우리는 그것을 놀이로만 여겼다. 방아깨비가 얼마나 두려웠을지, 그 몸짓이 얼마나 절박했을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초록빛 신비는 오래가지 않았다.

곤충의 다리는 아이들의 손을 견디기에는 너무 가늘고 여렸다. 잠시 뒤 손끝에서 작은 진동이 전해졌다.

툭.

방아깨비의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손가락 사이에는 마른 가지처럼 가벼운 다리 한 줄기만 남았다.

한쪽 다리를 잃은 방아깨비는 더 이상 방아를 찧지 못했다. 몸은 한쪽으로 기울었고 균형을 잃었다. 우리의 호기심도 그 순간 끝났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녀석을 풀숲으로 던져 놓고 다른 놀이를 찾아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미안한 순간은 바로 그때였다.

어린 나는 도마뱀을 떠올렸다. 도마뱀은 꼬리가 잘려도 다시 자란다고 들었다. 그러니 방아깨비의 다리도 언젠가는 다시 자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방아깨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나 자신의 변명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방아깨비의 다리는 한 번 떨어지면 다시 자라지 않는다. 그날 풀숲으로 돌아간 방아깨비는 남은 다리 하나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더 많이 흔들렸을 것이고, 작은 풀줄기 하나를 오르는 일조차 이전보다 훨씬 힘겨웠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어린 날의 기억은 더 이상 장난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생명의 균형을 무너뜨린 기억으로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기다란 다리가 방아깨비에게는 세상을 딛고 살아가는 전부였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방아깨비를 떠올릴 때마다 내 삶의 한 장면도 함께 떠오른다.

오랜 세월 서 있던 교단을 떠나던 날이었다. 학생들이 떠난 빈 교실, 분필 가루가 남아 있던 교탁, 마지막으로 바라본 칠판. 교실 문을 조용히 닫던 순간, 오래도록 나를 붙들어 주던 삶의 한 축이 빠져나가는 듯한 허전함이 밀려왔다.

몸의 긴 다리 하나를 잃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퇴직은 단순히 직장을 떠나는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온 균형 하나를 내려놓는 일이었다.

그러나 삶은 잃어버린 자리를 오래 바라보고 있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또 하루를 불러왔고, 나는 남아 있는 버팀 하나에 기대어 다시 일상을 배워야 했다. 예전처럼 완벽하게 설 수는 없었지만, 기울어진 채로 중심을 잡는 법은 조금씩 익혀 갔다.

그럴 때마다 문득 방아깨비를 생각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녀석도 남은 다리 하나를 더 깊이 디디며 버텼을 것이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다시 풀잎 끝에 닿으려고, 흔들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자라지 않는 다리를 원망하기보다 남아 있는 다리 하나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 하루를 견뎠을 것이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일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으로 다시 균형을 세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나온 날들의 잃어버린 조각을 모두 되찾을 수는 없다. 다만 오늘 내게 남아 있는 것들을 믿으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날 풀숲으로 사라진 방아깨비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외다리로 바람을 견디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흔들릴 때마다 다시 중심을 찾으려 애쓰는 내 삶을 조용히 비추어 준다.

 

*관련글 보기

심봤다, 은퇴 후에야 발견한 삶의 작은 행복

0도의 숲: 비교와 평가를 내려놓는 순간, 자기 수용의 시

폐휴지 수집 창고에서 마주한 시간과 실존의 철학 — 삶의 허무를 응시하다

 

선비천사의 브런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선비천사 브런치 바로가기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