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페이지에서
나는 더 이상 읽지 못했다
문장은 있었으나
넘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부엌 쪽에서 들려온 소리
국자가 냄비에 닿는 짧은 금속음
어머니는
그 소리 하나로
저녁을 끝내고 있었다
겨울이 깊어도
당신은 추위를 말하지 않았다
말 대신
문틈을 막았고
새벽을 먼저 일으켰다
손은 늘 굽어 있었으나
무언으로 정확했다
등을 밀 때는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묻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머니가 대답할 차례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루에 남은 발자국
헹구지 않은 그릇 하나
불이 꺼지지 않은 새벽
그것들이
당신의 문장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어머니를 이해한다는 것은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자리를 비워두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아직
그만큼
비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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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알겠다.
어머니를 이해한다는 것은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자리를 비워두는 일이라는 것을
참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군요. 어쩌면 시인이 이 시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를 제가 오독할 수 있겠지만, ‘자리를 비워 두는 일’에 대하여 독자인 저의 느낌은, 어머니의 빈 자리를 느끼는 일로 보입니다.
부엌 쪽에서 금속음으로 저녁을 끝내시던 모습, 겨울, 춥다는 말 대신 문 틈을 막고 먼저 새벽을 여시던 모습, 굽은 손이셨지만 늘 정확하셨던 모습은 화자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생전 모습이시군요. 시인이며 화자인 아들은 말없이 행동으로 쓰시는 어머니 문장을 읽으시고요.
하지만 어느 순간 어머니가 쓰시는 문장을 읽지 못하시는군요. 누구나 다가오는 때가 다가오는 것이지요. 움직임이 줄거나 없어지시어 새 문장을 만들지 못하시니, 차마 읽어낼 힘도 없고,
가족, 자식들이 읽을 문장을 온 몸으로 지어 오신 어머니께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무의미 한 것이지요. 이미 행동으로 보여 주셨으니. 이제는 그 의미를 가족이나 화자가 답해야 할 차례지요.
화자 어머니께서 쓰는 문장을 멈추니,
마루에 발자국이 남고, 헹구지 않은 그릇이 보이고, 새벽에도 꺼지지 않은 불이 보이네요. 어머니의 빈자리 모습이겠군요.
우리 말 격언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지요. 어머니께서 늘 함께 계시던 때는 어머니의 자리가 잘 드러나 않았는데, 어머니께서 계시지 않은 지금 어머니의 빈 자리는 크지요. 아직은 구석 구석에서 어머니의 문장이 남아 있지만 갈 수록 어머니께서 써 오신 문장은 또렷하여
잘 이해하게 되는 거지요.
시를 읽고 나니 저도 어머니가 또 그립습니다.
울림님, 긴 글로 시의 구석구석을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자리를 비워두는 일’을 어머니의 빈자리로 읽어주신 대목에서 저 역시 오래 머물렀습니다. 시를 쓸 때의 마음과 독자가 읽으며 만들어내는 마음은 꼭 같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곳까지 독자의 마음이 닿을 때, 시가 비로소 제 손을 떠나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어머니는 말보다 행동으로 더 많은 문장을 남기는 분이셨습니다. 문틈을 막는 손, 먼저 일어나는 새벽, 말없이 등을 밀어주던 순간들…. 그때는 너무 익숙해서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고 자리가 비고 나서야 한 문장씩 또렷하게 읽히는 것 같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씀도 이 시와 참 깊이 맞닿아 있네요. 어쩌면 그 빈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남긴 것들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자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저도 어머니가 또 그립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에 마음이 머뭅니다. 제 시 한 편이 울림님의 어머니를 잠시라도 떠올리게 했다면, 시를 쓴 사람으로서 그것보다 고마운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귀한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시보다 더 긴 여운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울림님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도 조용히 마음을 보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