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쳇, 쳇, 쳇—
일꾼들의 손놀림은
왜 이리 더딘지,
햇살에 눈꺼풀이 간질간질
하품처럼 스르르 열리다
그만 먼저 나와버렸지.
조금 이른 걸까.
바람은 자꾸 치마를 들추고,
노란 가방에 노란 옷,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재잘재잘 몰려온다.
뭐가 그리 신나는 걸까.
쳇, 쳇, 쳇—
화장품 냄새가 자꾸 코를 찌르고
땅벌도, 나비도 보이질 않네.
목련 그늘진 울타리 아래,
우리는 서로 기대어
먼저 주둥이가 터졌어
쳇, 쳇, 쳇—
봄날 오후,
삐죽삐죽
노랗게 피어나는
개나리의 작은 투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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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자벌레의 꿈에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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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월 초순, 땅에는 빈틈없이 봄 꽃들 사태이지요. 마치 전쟁과 살상, 파괴를 즐기는 인간들의 추악한 세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꽃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더없이 예쁘다는 것을 뽐내기라도 하듯. 예 전에 읽었거나 들었거나 했던 것이 생각 나네요. 인간의 물질(돈)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지요. 누구나 돈벼락 맞아 죽고 싶다는 심정일텐데요. 정작 인간이 그렇게 가지려는 돈을 가지면 무얼하나 보았더니 고작 그 돈으로 근사한 자연 경관을 사서 그곳에 집을 짓고 자기네 가족들과 들락거리며 살더라는 거지요. 자연을 파괴한 재원으로 돈을 벌어 자기는 자연 속에서 평안을 찾고 위로를 얻고 살더라는 모순을 이야기한 것인데요 그러고 보니, 돈좀 있는 자들은 배산임수 화려한 경관 자랑하는 곳곳에 세컨 하우스나 별장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지 싶군요. 선생님 시에서 ‘봄은 노랗게 (개나리처럼) 투정부리며 온다’는 생각에 공감했습니다. 개나리의 꽃 말 중. 희망이 있던데, 사람들의 희망은 왜 그리 실현되기가 어려운 걸까요. 예컨데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왜 그리 먼 꿈일까요? 허구헌날 전쟁이구. 이 땅의 통일은 언제나 이루어져 전쟁 걱정하지 않고 애들 키우며 사랑만 하며 살 수 있을까요? 6.25 때 전쟁을 팔십 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멈추지 못하고 겨우 잠시 쉬는(정전) 것으로 남북이 서로 죽이겠다고 군비 경쟁이나 벌이구 있으니 이대로면 이 곳은 논리상으로 지금 당장 다시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으니 말이지요. 노오란 개나리 같은 어린 아이들이 전쟁같은 무서운 것들일랑 완전히 잊어버리고 서로 사랑만 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은 왜 이리 투정부리듯 더디 오는 걸까요? 또, 오기는 오는 걸까요. 북풍한설의 삼동을 굳건히 나야 싹을 틔우는 개나리 꽃을 닮아 가혹한 상황이지만 투정부리듯이라도 오기나 오면 좋겠네요.
‘울림’ 님의 깊은 공감과 사유가 담긴 글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시 속 개나리의 투정은 그저 봄날의 작은 소란인 줄만 알았는데, ‘울림’ 님의 글을 읽고 나니 그 노란 꽃망울들이 마치 더디 오는 평화와 희망을 재촉하는 아이들의 아우성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자연을 부수어 돈을 벌고, 다시 그 돈으로 자연을 찾는 인간의 모순을 짚어주신 대목에서는 작가로서 저 역시 깊은 부끄러움과 책임을 느낍니다. 우리가 꽃 사태를 즐기는 이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 혹은 우리 머리 위 북쪽 하늘 아래에서는 여전히 대립과 갈등의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고 있지요.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노란 가방을 메고 재잘거리는 모습이 더 이상 위태롭지 않은 세상, 전쟁의 공포 대신 사랑만 가르쳐도 되는 세상은 왜 이리 개나리의 투정보다 더디 오는 것일까요.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가혹한 삼동(三冬)을 견뎌낸 개나리만이 그 눈부신 노란 빛을 터뜨릴 수 있는 법이겠지요.
비록 투정부리듯 느릿느릿 올지라도, 봄은 끝내 겨울을 이기고 우리 곁에 당도했습니다. 우리의 평화와 통일 또한 그럴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시 한 편에 이토록 넓고 깊은 울림을 더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