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거름이면 산자락 아래 흙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발끝에 조약돌 하나가 걸렸다. 툭 차니 몇 번 몸을 뒤집으며 길가로 굴러갔다. 작은 돌에도 저마다의 무게가 있는 모양이었다.
골목 어귀의 식당에서는 된장찌개 냄새가 흘러나왔다. 뽀얀 김이 찬 공기에 섞였다.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한 사내가 하품을 하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오늘 하루도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다. 밥을 먹고 몸을 누이고, 잠깐이라도 따뜻해지기 위해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다.
젊었을 때는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서고 싶었다. 손에 쥔 것이 적으면 마음까지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었으면 했고, 내가 살아온 흔적 하나쯤 세상에 남았으면 했다.
나이가 들면 그런 욕망도 사라질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욕망은 늙지 않았다.
젊은 날에는 더 갖고 싶다는 얼굴로 찾아오더니, 나이가 들자 잃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곁에 남았다.
사람을 붙잡고 싶었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내 이름을 누군가 오래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버리지 못했다.
한때는 그 마음만 사라지면 편안해질 것 같았다.
며칠 전 화면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이 걷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물건을 옮겼다. 넘어질 듯하다가 정확하게 균형을 되찾았다.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내 무릎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뻐근하고, 손마디는 예전보다 굵어졌다. 조금만 무리해도 숨이 찬다.
그런데 휴머노이드 로봇의 몸에는 세월이 보이지 않았다. 굳은살도, 주름도 없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배고픔이 없다면 밥 한 끼를 기다리는 마음도 없을까.
피곤하지 않다면 이불 속에 다리를 뻗을 때의 안도도 모를까.
누군가를 잃을까 두렵지 않다면 붙잡고 싶은 마음도 없을까.
그렇다면 참 편안하겠다고 생각했다.
욕망이 사라진 세상에는 남의 것을 탐낼 이유가 없다.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서로 밀어낼 필요도 없다. 시기와 질투도, 욕망에서 비롯된 다툼도 줄어들 것이다.
인간이 오래 꿈꿔 온 평화가 어쩌면 그런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화로운데도 그 풍경은 따뜻하지 않았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지만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 거리. 빼앗으려는 사람이 없는 대신 붙잡으려는 사람도 없는 세상.
물론 이것은 인간인 내가 만든 상상일 뿐이다.
욕망이 없다고 사랑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고통이 없다고 희망이 존재할 수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모르는 방식의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이르자 휴머노이드 로봇의 차가운 눈동자가 다르게 보였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기계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욕망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 앞에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세상에 자신의 마음을 입혀 왔다.
신에게 분노와 사랑을 주었고, 달과 별에 외로움을 주었다. 꽃이 지면 슬퍼했고, 바람이 불면 떠난 사람을 생각했다.
세상이 그런 감정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마디가 불거져 있었다.
젊은 날에는 이 손으로 무엇이든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살아 보니 손에 들어오는 것보다 빠져나가는 것이 많았다.
돈도, 사람도, 젊음도 그랬다.
붙잡고 싶다고 붙잡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오래도록 손을 펴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갖지 못한 것보다 놓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욕망을 내려놓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날들을 떠올리면, 그때의 나는 평온했던 것이 아니었다.
지쳐 있었다.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순간에는 대개 작은 욕망 하나가 있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덜 아팠으면 좋겠다는 마음.
한 번만 더 만나고 싶다는 마음.
미안하다는 말을 늦기 전에 전하고 싶다는 마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고 싶다는 마음.
누군가에게 잊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
거창하지 않았다.
그 작은 욕망들이 나를 다음 날 아침까지 데려다 놓았다.
욕망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붙잡게도 한다.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밀어낼 때도 있다.
그러니 욕망 자체가 인간다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욕망을 버리는 것과 욕망에 끌려가지 않는 것은 다른 일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완벽한 평온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오래 들여다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둠이 내려앉은 산길을 걸었다.
무릎이 조금 뻐근했다.
집 가까이 오자 어디선가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열린 창문 안에서 누군가 웃었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걸음을 조금 재촉했다.
집에 돌아와 찻물을 올렸다.
잠시 뒤 작은 찻잔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자 손마디 사이로 온기가 번졌다.
오늘도 버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잊고 싶은 사람 하나가 생각났고, 놓았다고 믿었던 미련 하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또 무엇인가를 바라며 눈을 뜰 것이다.
창밖에는 달빛이 산길 위로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찻잔을 조금 더 오래 쥐고 있었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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