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다섯이 되니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가끔 휴대전화를 열어 연락처를 천천히 훑어본다.
예전에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지가 궁금했다.
지금은 그 이름들보다, 끝내 사라지지 않은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십 년이 흘렀는데도 아직 안부를 묻는 사람.
명절이면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
기쁜 소식보다 힘든 소식을 먼저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이름 앞에서는 한참 동안 손가락이 멈춘다.
젊은 날에는 인간관계를 숫자로 생각했다.
친구가 많을수록 성공한 삶이라고 믿었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관계를 붙잡으려 애쓴 적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서른 무렵에는 친구를 잃는 일이 두려웠다.
연락이 뜸해지면 서운했고, 약속이 끊기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먼저 돌아보았다.
하지만 인생은 생각보다 길었고, 사람마다 살아가는 계절도 달랐다.
한 친구는 부모를 돌보느라 바빴고, 또 다른 친구는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하루조차 없었다. 어떤 이는 사업에 실패해 사람 만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고, 어떤 이는 말하지 못할 병을 안고 조용히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연락이 없는 것이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살아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가득 찬 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것을.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사람은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순을 넘어서 돌아보니, 잃은 것이 아니라 남겨진 것이었다.
시간은 신기했다.
억지로 붙잡은 인연은 어느새 멀어졌고,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이어질 인연은 긴 침묵마저 건너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영국의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는 사람이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젊었을 때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조금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위로처럼 들린다.
모든 사람을 품지 못하는 것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몇 사람을 오래 품고 살아가는 일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살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젊은 날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지금은 내 앞에서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말없이 차 한잔 마셔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헤어진 것처럼 웃을 수 있는 사람.
내 성공보다 내 건강을 먼저 묻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 삶을 오래 지켜 준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배웠다.
사람들은 행복의 조건으로 돈이나 성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80년 넘게 이어진 하버드 성인발달연구는 결국 좋은 인간관계가 행복과 건강을 오래 지켜 준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 연구를 처음 읽었을 때는 새로운 지식을 얻은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연구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해 준 셈이었다.
예순다섯이 된 지금도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예전처럼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대신 오래된 친구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냐는 짧은 말 한마디가 때로는 긴 편지보다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생은 참 묘하다.
젊었을 때는 사람을 잃을까 봐 두려웠는데, 이제는 함께 늙어 갈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흰머리가 늘어나는 속도를 함께 바라보고,
건강검진 결과를 걱정하며 웃을 수 있고,
서로의 부모를 추억하고,
먼저 떠난 친구를 함께 기억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축복이다.
예순다섯이 되어 돌아보니, 서른의 인간관계는 아직 시작도 아니었다.
그때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법을 배웠다면,
지금은 사람을 오래 지키는 법을 배운다.
인간관계는 많은 사람을 내 곁에 머물게 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서로의 안부를 잊지 않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해졌다.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까지 우리를 따뜻하게 지켜 주는 것은 큰 성공도, 화려한 경력도 아닐 것이다.
문득 전화기를 열었을 때, 망설임 없이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이름 몇 개.
그 이름들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시간의 가장 아름다운 증거라는 것을, 이제야 조용히 인정하게 된다.
*관련글 보기
AI가 지배하는 미래,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 단편소설 〈영생의 그림자〉
선비천사의 브런치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 이 글이 마음에 남으셨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나눠주셔도 고맙겠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35-3671093 (방철호)
이 글들을 엮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라는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 전자책 보러 가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