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온도가 사라진 날

석진은 자신의 왼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 마디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굵게 부풀어 있었다. 아침마다 주먹을 펴는 데 몇 분씩 걸렸고, 단추 하나 채우는 일에도 식은땀이 났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은 스물세 살 청년의 손처럼 희고 매끄러웠다.
석진은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 아무런 통증도 없었다.
그는 웃었다.
수십 년 만에 몸을 움직이는 일이 즐거웠다.
“민석진 님, 역노화 3단계 시술이 완료되었습니다. 생물학적 연령 23.4세. 신체 기능 정상화 성공률 99.7퍼센트.”
의사 로봇 DR-09가 말했다. 은색 티타늄 외피에 달린 렌즈들이 회전하며 석진의 얼굴과 손을 스캔했다.
“주요 자전적 기억 보존 상태 정상.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생애를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석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무릎이 부드럽게 굽혀졌고 허리는 곧게 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을 걷다가 속도를 높였다.
발이 바닥을 차고 나갔다.
달릴 수 있었다.
“중앙 보행 트랙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간호사 로봇이 경고했지만 석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는 평생 다시 뛰지 못할 줄 알았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세워진 중앙 역노화 의료센터는 거대한 유리 성전처럼 솟아 있었다. 출입구 위 전광판에서는 같은 광고가 반복되고 있었다.
당신의 시간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역노화 기술이 상용화된 뒤, 사람들은 늙지 않는 삶을 사기 위해 집을 팔고 퇴직금을 털었다. 의료센터 주변에는 빈 상가가 늘어났지만, 건물 안에서는 매일 수천 명의 노인이 젊은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석진 역시 평생 모은 재산을 모두 쏟아부었다.
그는 일흔여덟이었다. 교직에서 은퇴한 뒤 동네 아이들에게 무료로 공부를 가르치며 살았지만, 관절염이 심해지면서 그마저 그만두어야 했다. 아침마다 약을 삼키고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내 혜수가 세상을 떠난 것은 삼 년 전이었다.
혜수는 생전에 역노화 시술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다시 젊어진다고 당신하고 처음부터 살 자신도 없어요.”
“나하고 사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그럼요. 당신 고집이 얼마나 센데.”
혜수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같이 늙은 건 좋았어요.”
석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늙는다는 것은 아프고 불편해지는 일이었다. 혜수는 마지막 몇 년을 병원에서 보냈다. 두 사람이 함께 늙은 결과가 그것이라면 무엇이 좋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혜수가 죽기 전날 밤, 석진은 병실에서 아내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굳어진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모으다가 붉은 자개 머리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딸깍.
석진은 허리를 숙이지 못해 한참 동안 머리핀을 바라보기만 했다.
혜수가 침대에서 손을 뻗었다.
“그냥 둬요. 당신 손도 아픈데.”
“당신이 평생 쓰던 건데.”
“그깟 머리핀이 뭐라고.”
혜수는 웃었다.
그 머리핀은 오십 년 전, 석진이 교사로 첫 발령을 받고 받은 월급으로 사준 것이었다. 혜수는 촌스럽다며 투덜거리면서도 평생 오른쪽 관자놀이에 꽂고 다녔다.
석진은 새것을 사주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혜수는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날 밤 혜수는 머리핀을 석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당신은 나처럼 살지 마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요.”
“당신 없는데 내가 뭘 하겠어.”
“그걸 이제부터 찾아야지.”
혜수는 다음 날 새벽 세상을 떠났다.
석진은 아내의 마지막 말을 지키고 싶었다. 아내를 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혜수와 함께 살았던 세월을 간직한 채, 남은 삶을 조금 더 살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역노화 시술을 선택했다.
▲ ▲ ▲
퇴원 수속 구역으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수백 개의 캡슐 병실이 늘어서 있었다.
강화유리 너머에서 의사 로봇들이 노인들의 몸에 역노화 용액을 주입하고 있었다. 주름진 피부가 펴지고 굽었던 척추가 제자리를 찾았다. 검버섯과 흉터가 사라진 자리에는 매끄러운 피부가 드러났다.
석진은 한 캡슐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노파의 왼쪽 뺨에 있던 커다란 점이 레이저에 지워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젊은 시절 교실 유리창을 수리하다 베인 흉터가 사라져 있었다.
혜수는 그 흉터를 볼 때마다 핀잔을 주었다.
“선생님이 공부나 가르치지, 왜 유리창까지 고쳐요?”
“우리 반 애들이 다칠까 봐 그랬지.”
석진은 손등을 문질렀다. 흉터가 사라진 것은 반가웠다. 그러나 그 흉터에 얽힌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제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때 복도 끝에서 고함이 터졌다.
“놔! 이거 놓으라고!”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 간호사 로봇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청년은 건강한 몸으로 발버둥 쳤지만,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환자 ID 4092. 역노화 과정에서 해마 영역 손상 확인. 장기 기억 85퍼센트 상실. 격리 구역으로 이송합니다.”
“내가 누구냐고! 왜 아무도 말을 안 해!”
복도 한쪽에는 백발의 노파가 주저앉아 있었다.
“창수야! 엄마야. 엄마 모르겠니?”
청년은 노파를 노려보았다.
“저 할머니가 왜 내 엄마야? 난 스무 살인데!”
노파는 아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로봇이 가로막았다.
“창수야, 어릴 때 다리에 화상 입었잖니. 엄마가 업고 병원까지 뛰어갔잖아.”
노파는 청년의 바짓단을 걷으려 했다. 그러나 흉터는 없었다. 역노화 시술이 오래된 화상 자국까지 지워버린 것이었다.
노파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럼 내가 뭘로 널 알아보게 해야 하니.”
청년은 끝내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 채 지하 격리 구역으로 끌려갔다.
석진은 간호사 로봇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기억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회복 가능성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저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까?”
“역노화 3단계 시술의 신체 기능 정상화 성공률은 99.7퍼센트입니다.”
“기억을 잃어도 성공한 겁니까?”
로봇의 눈동자가 푸르게 깜빡였다.
“기억 손상은 신체 기능 정상화 성공률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석진은 입을 다물었다.
복도 아래 격리 병동에서는 피부에 붉은 반점이 번진 환자와 복부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환자가 치료받고 있었다. 의료센터는 그들을 실패한 신체 재생 사례로 분류하고 있었다.
석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성공한 환자였다.
적어도 의료센터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 ▲ ▲
석진은 다시 걸었다.
그러다가 습관처럼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붉은 자개 머리핀이 닿았다.
그는 머리핀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오십 년 전의 풍경이 떠올랐다. 학교 앞 작은 가게, 유리 진열장, 첫 월급이 들어 있던 봉투까지 기억났다.
혜수는 머리핀을 받고 웃었다.
“이런 걸 누가 하고 다녀요. 색깔도 촌스럽게.”
그러면서 바로 머리에 꽂았다.
석진은 그 장면을 분명히 기억했다. 혜수가 웃을 때 오른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기억이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혜수가 죽던 날을 떠올렸다. 병실의 흰 벽과 창가의 화분, 침대 옆에서 울던 딸의 얼굴이 선명했다. 혜수의 손이 차가워지던 순간도 기억했다.
그러나 슬프지 않았다.
석진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 사실에 따라붙던 슬픔이 사라져 있었다.
“혜수야.”
그는 작은 목소리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일은 쉬웠다. 그 이름에 담긴 감정을 느끼는 일은 불가능했다.
석진은 가까운 안내 단말기로 다가갔다.
“정서 기억 손상 검사를 받고 싶습니다.”
화면에 푸른 글자가 나타났다.
자전적 기억 정보 보존 상태: 정상.
“그건 압니다. 아내를 기억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정서 반응은 개인차가 크므로 표준 검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치료는요?”
현재 확인된 신체 기능 이상은 없습니다.
석진은 화면을 노려보았다.
“내가 아내를 사랑했다는 건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모르겠다고요.”
잠시 후 새로운 안내문이 나타났다.
과거 정서 반응의 변화는 신체 기능 정상화 판정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추가 상담을 원하시면 유료 신경 정합성 검사를 신청하십시오.
검사 비용이 표시되었다.
석진은 숫자를 확인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미 집도 퇴직금도 없었다. 남은 돈으로는 검사비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단말기에 다시 물었다.
“새로운 감정은 생길 수 있습니까?”
해당 항목에 관한 임상 자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앞으로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까?”
현재로서는 예후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석진은 화면을 껐다.
젊어진 몸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그는 지금 당장 소래산 정상까지 달려갈 수 있었다. 내일도, 십 년 뒤에도 건강하게 걸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누구와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다시 늙은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 것인가.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무릎 통증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새벽마다 약을 삼키며 죽음을 기다리던 생활로 돌아갈 자신도 없었다.
혜수를 사랑했던 감정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다시 늙어야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석진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내를 사랑했다는 기억보다 고통 없는 육체를 더 아끼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잘못인지도 알 수 없었다.
살고 싶다는 마음은 죄가 아니었다.
그는 혜수에게 다시 묻고 싶었다.
같이 늙은 것이 정말 좋았느냐고.
당신은 아프지 않은 몸과 나를 기억하는 마음 중 무엇을 선택했겠느냐고.
그러나 혜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 ▲ ▲
의료센터의 유리문이 열리자 광화문의 찬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석진은 유리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스물세 살의 청년이 서 있었다. 넓은 어깨와 곧은 허리,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낯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광장에는 젊어진 사람들이 가득했다. 누군가는 웃으며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휴대전화로 가족에게 연락했다. 한 여자는 자신보다 늙어 보이는 딸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석진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일을 겪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잃지 않고 젊음을 되찾았을까.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딸이었다.
“아빠, 시술 끝났어? 괜찮아?”
“그래. 몸은 아주 좋아.”
“목소리가 이상한데. 무슨 일 있어?”
석진은 잠시 망설였다.
“혜수 생각이 나서.”
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빠, 엄마가 살아 계셨으면 좋아하셨을까?”
석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혜수가 뭐라고 말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고집스럽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그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상을 해도 아무런 기쁨이 일어나지 않았다.
“글쎄.”
석진이 말했다.
“아빠도 잘 모르겠다.”
전화를 끊은 뒤 그는 광장 한쪽 벤치에 앉았다.
집은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학교에는 더 이상 그를 기억하는 학생들이 없었다. 혜수와 함께 다니던 시장과 산책로는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그곳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냈다.
붉은 자개가 오후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석진은 머리핀을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금속 스프링이 작게 삐걱거렸다.
혜수는 그 머리핀을 평생 간직했다.
석진은 자신이 왜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내가 남긴 마지막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감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머리핀을 쓰레기통 쪽으로 들어 올렸다.
혜수는 이미 죽었다. 머리핀을 간직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낡은 플라스틱 조각을 계속 가지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석진은 팔을 뻗었다.
그러나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머리핀은 손바닥에 남았다.
수십 년 동안 아내의 물건을 조심스럽게 다루던 습관이 아직 손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석진은 그 사실이 두려웠다.
자신의 마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데, 몸은 여전히 혜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의료센터에서 나온 청소 로봇이 다가왔다.
“고객님, 파손된 생활용품을 소지하고 계십니다. 폐기 처리를 도와드릴까요?”
석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폐기를 원하지 않는 사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석진은 입을 열었다.
이 머리핀은 아내가 평생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사준 선물이었다. 아내는 죽기 전날 이것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는 모든 사실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왜 버리면 안 되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석진이 말했다.
“가지고 있을 거야.”
로봇은 더 묻지 않고 떠나갔다.
석진은 머리핀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딸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멈췄다. 아직 그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딸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예전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걸었다.
“아빠?”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을 수 있겠니?”
“그럼. 내가 데리러 갈게.”
석진은 잠시 망설였다.
“아니다. 내가 갈게.”
“아빠, 길은 기억해?”
“기억하지.”
석진은 딸이 사는 동네와 아파트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버스 노선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오려고?”
석진은 주머니 속 머리핀을 만졌다.
“할 얘기가 있어서.”
“무슨 얘기?”
그는 대답을 고르느라 잠시 침묵했다.
“네 엄마 얘기.”
딸은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기다릴게.”
통화가 끝났다.
석진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십 분이 남아 있었다. 젊어진 다리는 가볍고 튼튼했다. 그는 정류장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천히 걸었다.
혜수는 함께 늙은 것이 좋았다고 말했다.
석진은 여전히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늙은 몸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석진은 주머니 속 머리핀을 다시 만졌다.
딸을 만나면 혜수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자신이 잊어버린 감정들을 딸은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석진은 머리핀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붉은 자개는 오래되어 빛이 바랬고, 플라스틱 끝에는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그는 머리핀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이번에는 버리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아직 그 이유를 모르더라도, 버리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도착했다.
석진은 젊고 건강한 두 다리로 차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중앙 역노화 의료센터의 전광판이 보였다.
당신의 시간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석진은 그 문구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가 좋아하던 반찬이 뭐였지?”
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
“아빠가 해주던 달걀말이. 엄마는 그거 제일 좋아했잖아.”
석진은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달걀말이를 만들던 기억은 있었다. 혜수가 식탁에 앉아 젓가락을 들던 모습도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의 행복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휴대전화 화면을 끄지 않았다.
대신 딸에게 한 문장을 더 보냈다.
“오늘은 내가 만들어 줄게.”
버스가 광화문을 벗어났다.
석진은 창가에 앉아 머리핀을 쥐고 있었다. 그것을 간직해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도 아무런 감정이 돌아오지 않을지 몰랐다.
그래도 그는 딸과 함께 식탁에 앉을 생각이었다.
혜수가 없는 자리에서 혜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을 하나씩 말해줄 생각이었다.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멈췄다.
석진은 손바닥을 펼쳤다.
붉은 자개 머리핀은 그대로 있었다.
그는 다시 손을 오므렸다.
이번에는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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