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골목, 젓갈 가게 앞을 지나다 무심코 멈춰 섰다.
투명한 봉지 안에 빼곡히 눌린 벤뎅이젓.
소금물 속에 절여져 몸을 구긴 채 쌓여 있는 그것들을 바라보는데,
문득 가슴 한쪽이 찡해졌다.
작은 생선 하나가 그렇게 오래 기억에 남을 줄은 나도 몰랐다.
벤뎅이는 흔한 생선이다.
작고, 연약하고, 심지어 속이 비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속 없는 놈”이라며 가볍게 부른다.
뼈째 씹히고, 값싸게 팔리고, 흔하게 소비된다.
겉보기에 별 의미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런 ‘속 없음’이 나에게는
깊은 물음으로 다가왔다.
비어 있다는 건, 정말 없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감춰두었다는 뜻일까?
사람도 그렇다.
속을 보이지 않는 사람,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자주 “속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 많이 참았고,
더 오래 생각했으며,
더 깊이 느꼈다는 것을.
말이 없는 사람이 모두 무심한 건 아니다.
단지 말을 아끼는 것이다.
마음을 함부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벤뎅이처럼.
한 번은 어릴 적 외할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바닷가에서 살던 시절,
아침마다 나무 소쿠리에 벤뎅이를 담아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했다.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짠내는 손등을 베듯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젓갈을 팔아 자식들 학비를 냈다고,
당신은 그걸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때부터
벤뎅이는 나에게
‘작지만 많은 것을 품은 생명’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견딘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절여진다고 모두 썩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썩지 않기 위해 절이는 것이다.
벤뎅이젓도 마찬가지다.
절인다는 건 버티는 방식이다.
짠맛 속에 시간을 눌러 담는 일이다.
그 짠맛은 기억이고,
인내이며,
사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벤뎅이젓은 단순한 반찬이 아니었다.
삶을 견딘 자의 증표 같았다.
보잘것없는 듯 보여도, 그 속엔
파도 소리가 들리고,
바닷바람이 스며 있고,
한 여름 땡볕의 소쿠리가 들어 있다.
결국 속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요즘,
누군가를 속 없다고 쉽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없는 사람을,
드러내지 않는 마음을 가볍게 보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조용한 이들의 깊은 침묵을
귀하게 듣기로 했다.
우리가 종종
속이 비었다고 여기는 것들이야말로,
속이 가장 깊은 것은 아닐까.
그러니
벤뎅이를 함부로 속 없는 놈이라 부르지 말자.
그는 단지,
너무 많이 담고 있어서,
차마 다 보여주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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