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비 오는 봄밤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이 돌았고, 나는 조용히 물잔을 들었다.
괜찮다고, 이게 좋다고 말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단단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축축한 신발과 달리 마음은 개운했다.
그날 이후, 나는 알게 되었다.
'적당히 살아도 괜찮다'는 걸.
요즘 나의 하루는 단정하다.
창을 열고 바람을 맞는다.
따뜻한 물 한 잔, 간단한 식사.
집 앞을 걷는 짧은 운동.
이 작은 루틴이 나를 깨운다.
세상도, 나도 조용하다.
직장에선 묵묵히 일한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나를 존중하는 방식이니까.
가끔 스스로 묻는다.
"이 일이 정말 의미 있나?"
그러다 동료의 한마디, 고객의 고마움이 나를 붙잡는다.
욕심은 줄이고, 기대도 덜한다.
실망도, 비교도 줄었다.
무언가를 얻기보다
이미 가진 걸 바라본다.
그래서 생긴 마음의 여백.
그 안에 작은 기쁨이 들어온다.
고양이 한 마리의 느긋함.
책 한 페이지의 울림.
거창하진 않아도, 조용한 행복.
밤이 되면 휴대폰을 멀리 둔다.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두 손을 가만히 모은다.
예전엔 생각이 많아 괴로웠다.
지금은 안다.
중요한 일은 많지 않다는 걸.
"오늘도 잘 버텼어."
그 한마디에 미소 짓는다.
그렇게 잠드는 밤은 고요하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억지로 친한 척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연결되는 몇 사람만으로 충분하다.
불편한 관계에 매달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이들과 함께한다.
주말이면 교회에 들른다.
말없이 앉아 기도한다.
미움도, 자책도
그 고요 속에서 가라앉는다.
나는 거기서
내 마음을 다시 정리한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아이가 울었다.
지친 엄마 옆에서 나는 조용히 자리를 내주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날 하루가 따뜻해졌다.
작은 행동 하나로도
누군가의 하루에 스며들 수 있다는 것.
위로라는 걸 알게 됐다.
살아보니
짜릿함은 거대한 성취보다
나를 지켜냈다는 조용한 확신에서 온다.
화려하지 않아도
단정한 하루 속에
나는 진짜 나를 만난다.
오늘도 적당히,
그러나 정성스럽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용히 나를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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